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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온 Oct 10. 2023

아빠

당신이 되지 않겠다고

지금의 상황이 어찌 되고 있든 나는 매 순간 한 아이의 아빠로 살아가고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강하지 않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을 졸업한 그다음 해에 돌아가셨는데 이전에도 오랜 유학생활 때문에 초등학교 이후로는 같이 지낸 시간이 적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적다 보니 장점이라고 하면 아버지의 나쁜 습관들까지도 흐릿해 아버지와는 아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점, 단점이라고 하면 나도 의식적으로 알아채지 못하는 아버지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혼소송에 대해 한편으로 감사하는 건 내가 여태 살아왔던 내 삶을 전반적으로 돌아볼 시간이 반강제적으로 생겼다는 건데 어머니와 더불어 아버지의 흔적은 내 구석구석에서 박혀 있었다. 다만 기억이 오래되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탓에 찾아내기 어려웠을 뿐.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까놓고 말해 스무 살이 넘도록 살아계셨었는데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이면 마음에 고이 간직했겠지. 장례식 때도 난 울지 않았다. 관이 화장터로 들어가던 그때는 분위기에 따라 눈물이 났을 뿐 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없었다.


아버지는 모범적인 사람이었다. 아침에 늘 일찍 일어나 뒷산에 오른 후 약수를 떠 왔고 내가 일어날 때쯤이면 식탁에 앉아 신문을 보고 계셨다. 체면을 중시했기에 늘 옷매무새와 머리를 단정하게 관리했으며 깔끔한 걸 좋아해 시간이 나면 집을 스스로 치웠다.


요리는 할 줄 몰랐지만 어머니가 잠깐 자리를 비우더라도 배달음식을 시키든 주변 친척들에게 부탁하든 제때 식사를 챙겼으며 기념일을 늘 챙기고 작은 일이라도 생기면 늘 가족들이나 친척들과 함께 식사자리를 만들었다.


선배들에게 깍듯한 사람이었으며 후배들을 잘 챙기는, 덕분에 장례식이 이어지는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엄격하고 강압적인 사람이었다.


집안 자체가 엄한 가풍을 가지고 있었고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아버지의 그런 성격을 더 강화시켰던 것 같다.


어릴 적 유난히 짓궂던 내 성격 탓에 아버지에게 맞은 기억은 수도 없다. 내가 보던 만화책들을 찢어발기고 내가 읽던 판타지 소설마저 조롱하며 찢어버린 탓에 나는 책방에 연체료보다 책값을 물어준 적이 더 많았다.


음악을 듣는다는 이유로 시디들을 부수고 급기야 시디플레이어를 부쉈으며 공부를 안 한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때부터 새벽까지 공부방에 가둬놓고 공부를 시켰다. 자신의 생활방식을 강요해 매일 아침 나를 억지로 끌고 산에 데려갔으며 싫다는 가족여행도 억지로 끌고 가다 내가 불만이라도 내비치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했다.


그래. 죽이고 싶었다. 힘만 있다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니었다. 유독 작은 누나를 예뻐했는데 그런 작은 누나가 나한테 조그마한 트집이라도 잡을라치면 나는 작은 누나를 때렸고 뒤이어 아버지는 다시 나를 때렸다.


나는 맞으면서도 작은 누나를 노려보며 아빠만 없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더 강하게 제압했는데 그에 따라 나는 더 표독스럽게 반항했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작은 누나와는 좀 서먹하다. 이마저 잊고 있었던 기억이었다.


그때부터 자라난 폭력성은 학창 시절동안 나를 종종 문제에 빠트렸다.


그나마 체구가 작고 약하던 어릴 때는 그 범위가 적었지만 사춘기를 거치며 아버지를 따라 체구가 커지고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며 힘이 붙자 학년이 아니라 학교 내에서 화난 나를 막을 사람이 없었다.


어떤 이유로 시작된 폭력이든 바로 퇴학으로 처리해 버리는 당시 학교들의 규율이 없었으면 참 한심한 생활을 했을 것 같은데 그래도 퇴학은 싫었던지 한국에서 흔히 발견되는 학폭 가해자의 삶은 용케 피해 갔었다. 천성이 남을 다치게 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닌지라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성격이 다소 괴팍한 편이었던 건 어쩔 수 없었다.


고등학생쯤 됐을 무렵 방학 동안 한국에 와있었는데 나는 이미 아버지와 키도 비슷했고 누구한테 맞고 다닌 도 기억 안 날 만큼 나름 포식자의 삶을 살고 있던 시기였다. 정말 별거 없는 주말이었는데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아버지는 내가 짜증스럽게 대답하자 갑자기 의자를 집어 들어 나를 패기 시작했다. 의자 3개가 부서지자 이성을 잃은 나는 의자 다리를 들고 아버지에게 달려들다 그냥 의자다리를 집어던지고 서럽게 울었다. 정말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그 후로 아버지는 대놓고 내게 폭력을 쓰진 않았지만 우리의 대화는 거의 없었다. 오랜 외국생활로 사고방식이 맞지 않던 나는 차라리 아버지와 말을 섞지 않는 편이 더 좋았고 이따금씩 아버지와 말다툼을 하면 아버지는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나를 조롱했다.


그래도 아버진데. 원래 그 세대 어른들이 좀 그랬잖냐. 그게 나름의 애정방식이었다. 그런 말들이 제일 싫었고 지금도 싫다. 그렇게 자라났던 내 안의 어둠들은 온전히 나 혼자 감당해야 했으며 아마 지금까지 살아있었어도 지금의 어머니가 그러하듯 내게 사과나 한번 제대로 했을지 모를 인간이었다.


아버지 이전에 인간 같지도 않았던 인간. 큰아버지한테는 싫다는 말 한마디 못했으면서 처자식들한테 횡포나 부리던 인간. 그게 내 아버지. 내가 이 나이가 돼서도 아직 아버지를 용서할 자신이 없다. 죽었으니 망정이지 어머니 한 명도 생각할 때마다 머리 아픈데 둘이서 쌍으로 아직도 꼬장거리고 있었을 걸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  


죽어야 끝난다. 나는 이 말이 아버지를 위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죽어서 끝났다 진짜.


만약 내게 딸이 아니라 아들이 첫아이였다면 나는 분명 아버지가 내게 했던 실수들을 답습했으리라고 얼마 되지도 않는 재산 모두를 걸 수 있다.


천만다행으로 딸이었기에, 밉지만 사랑했던 아내의 얼굴을 닮은 여자아이 었기에 나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 있던 연결고리를 다시 이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난 딸에게 대단한 아빠는 아니다. 하지만 지독하게도 멍청했던 부모들 덕분에 자식에게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는 배웠다. 축제에 간 아이가 다리가 아파 못 걷겠다고 하면 쉬었다 갈 정도는 된다. 쉴 만큼 쉬고 나면 아이는 내게 이제 다시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생각보다 길지 않다.


억지로 안고 가지도 조금만 참으라며 나무라지도 않는다. 아이가 집에 가고 싶다고 하면 내게 남은 볼일이 없는 이상 그냥 집으로 간다. 반드시 봐야 하는 볼일이 있으면 아이에게 양해를 구한 후 아이가 최대한 피로를 느끼지 않도록 빠르게 해결한 후 집으로 간다.


굳이 같이해야 할 이유가 없다면 아이에게 시간을 자유롭게 주는 편이다. 아이가 자기 시간 동안 자신의 손에 닿는 물건들로 시간을 보내는 걸 보고 있는 건 내 나름의 취미 중 하나다. 어떻게 저렇게 작은 머리에서 저런 생각들이 나오고 그 고사리 같은 손들이 그런 그림들을 그리고 종이를 붙여나가는지 신기할 뿐이다.


의사결정은 스스로 할 수 있지만 답은 내려질 뿐이다. 스스로 답을 정할수록 답을 잃어버린다. 만약 여태껏 살아있다면 아버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곱게 해 줄 생각은 없고 뺨이라도 한대 걷어 올린 뒤에 해주고 싶다.


나는 나 자체로 답이었다. 당신이 찢어버린 내 만화책들, 소설책들, 셀 수도 없이 부수고 내다 버린 내 물건들 하나하나에 사과시키고 싶다. 당신이 오답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내겐 나 그 자체였다.


최악의 오답은 최고의 정답과 등을 맞댄 양면에 공존한다.


이 머저리 같은 사회는 지독히도 정답을 가르치려 들지만 그러려면 오답 역시 가르쳐야 한다는 간단한 것도 여태껏 모르는 듯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는 내게 최고의 스승이었다.


내가 나를 수리하는 동안 타인에게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타인을 배려한다는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내 부모로부터 받고 싶었던 배려, 대우, 가장 기본적인 감정적 보살핌. 당신이 그걸 우습게 여겼기 때문에 여즉 제삿밥도 못 얻어먹고 있다는 걸 알까.


당신이 그렇게 강조하던 사회적 지위와 타인의 시선, 경제적 안정 중 얼마만큼이나 당신 유골함에 담겼나. 내가 그때 보니까 뼛가루 좀 들어있고 끝인 것 같던데.


어머니는 내가 이런 얘길 하면 내가 정말 돈 때문에 걱정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분개하시는데 어머니, 나 지금 통장에 다음 달 생활비도 없어요. 근데도 나한테는 그런 게 더 중요해. 정신 좀 차리세요. 돈이야 어디 식당 가서 설거지만 해도 받는 건데 뭐 그리 대단하다고 벌벌 떨어요. 그렇게 말하면 어머니는 내가 그 나이 되도록 세상을 몰라서 그렇다고 자리를 떠버리신다. 그러니 친구가 없지.



꼭 이래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그마저 집착 같아 그저 지금의 내게서 아버지의 흔적들을 종종 발견하면 되짚어보는 정도만 하고 놓아버리는 작업을 계속 반복 중이다.


어떤 건 찰나의 깨달음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어떤 것들은 지금의 내 생활과 교묘하게 붙어있어 떼어내기가 힘들 때도 있다. 그럴 땐 그저 지켜보는 정도만 한다. 지켜보다 보면 어느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오르고 자연스럽게 행동이나 습관이 바뀐다.


나는 지금의 직장을 그만둘 생각이다. 딸과 함께 지내기엔 내 퇴근시간이 조금 늦는데 그 시간 동안 아이를 다른 사람 손에 맡기기엔 불안하다. 좋은 기업이고 대우도 좋은데 남한테 맡겨서라도 돈을 더 벌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걸 잘난 내 부모님이 했었는데 지금 내 손에 그렇게 벌었던 돈이 한 푼도 없다. 이건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기억력과 지능의 문제다.


좋은 남편이 되는 데는 실패했지만 아직 아버지로서는 기회가 남아있다. 어느 쪽을 택할지 정말 이게 고민해야 할 문제인가 싶다. 한치 고민 없이 내린 결정이다.


돈은 언제고 다시 벌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담는 그물은 촘촘해야 한다. 사람이 가진 그릇도 그물도 가정에서 만들어지고 그 시작은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라는 생각을 한다. 운이 좋아 사회적 지위도 얻고 경제적 풍요도 얻을 수 있지만 마음에 구멍이 있다면 죄다 빠져나간다.


평생 거지라도 어떠하리. 솔직히 어지간한 일이 벌어져도 알아서 적당히 벌어먹고 살 것 같긴 하다만 평생 주머니에 만 원짜리 한 장 제대로 없다한들 별로 무섭진 않다. 그저 딸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 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다. 내가 죽고 난 후 딸이 나를 기억할 때 지금 내가 내 아버지를 기억하는 것보다는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길.


참 이런 생각할 때 보면 아버지는 죽고 나서도 나를 피곤하게 하는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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