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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온 Oct 10. 2023

다스리지 말고 우선 

왜 화를 내지 않으세요. 내게 그 질문을 한 건 심리상담사님이 처음이었다.


나는 화내는 걸 평생 싫어했는데 지금도 기묘할 정도로 화를 잘 내지 않는 성격이다. 그걸 본능적으로 눈치채는 사람들은 몇 명 있었지만 그에 대해 의문을 표한 것도, 화를 낼 땐 당연히 내야 한다는 걸 말해준 것도 심리상담사님이 처음이었다. 


따지고 들어가면 아버지 때문에 엉킨 실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인데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본인이 강압적으로 흐름을 주도하다 내가 조금이라도 반발하거나 공격성을 보이면 강하게 찍어 눌렀었다. 체구도 크고 실제로 힘도 셌던 사람이라 어릴 적 내겐 불가항력의 존재였는데 물리적 폭력만큼 감정적인 억압을 심하게 받았었다. 


꾹꾹 눌러진 감정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나보다 약한 이들을 향해 표출되곤 했었고 이것이 어느 선을 넘어가면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제지를 당했다. 아버지도 참 모자란 인간이었다 싶은 게 왜 자기 자식을 때렸냐는 다른 부모의 전화를 받고 나면 나를 또 혼냈다. 풍선효과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느냐고 귀싸대기나 한대 다시 날려주고 싶다. 


어찌 됐건 그런 회전목마 속에 갇혀있다 보면 일종의 무력감 비슷한 게 생긴다. 누구는 나한테 그런 폭력적인 감정들을 서슴없이 쏟아내는데 나는 풀 데가 없으니 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이걸 어디 풀자니 되려 다시 나한테 돌아올 테고. 


회피라는 방어기제는 그렇게 발달한다. 


화를 잘 내는 사람 주변에 있는 건 불편하다. 누구에게든 그게 편할리 없겠지만 나는 정말 근처도 가지 않는다. 경멸한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그냥 그 감정 자체가 불편하다. 


그런 사람들과 잘 지내는 사람들에게 어쩌다 물어볼 기회가 생기면 그 사람들은 의외로,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그 사람 나쁜 사람은 아니야, 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데 나는 한편으로 신기해하면서도 그런 사람들과도 거리를 둔다. 자기 화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걸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니 분명 주변에 그런 사람들을 또 두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꽤 오랜 시간을 이런 식으로 지내다 보니 주변에는 온통 도인들만 남았다. 생각해 보면 좀 웃긴데 어찌 그리 다들 착한 친구들만 모아놨는지 같이 섞여있다 보면 나도 화낼 일이 없어서 좋긴 하다. 


친구사이까진 어찌어찌 되지만 연애에서는 조금 힘들었는데 이성과 만나다 보면 곧잘 싸울 일이 생기기 마련이었고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어쩌다 화라도 한번 내면 내가 연락두절이 돼버리거나 급격히 거리를 벌리니 결국 이 부분이 문제가 되어 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딱히 이 부분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뭔가를 참아가며 연애할 자신은 없었으니 돌아서면 차라리 잘된 거라며 스스로 다독였다. 그래, 지금 생각해 봐도 뭔가를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다 싶다.  


이 부분에서 결혼생활은 조금 힘들었다. 


아내는 화를 정말 안내는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나도 그걸 알기에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거였지만 표출을 못하는 사람이었기에 되려 안으로 곪 아들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것까진 알지 못했다. 


같이 부대껴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감정적으로 마찰을 겪게 된다. 하다못해 샤워하고 나왔을 때 발수건 위치만 틀어져있어도 기분은 상할 수 있는 거니까. 내 머리카락은 안 보여도 상대가 흘리고 간 머리카락은 그렇게 잘 보인다. 


내가 그랬듯 아내 역시 결핍이 있던 사람이었고 어느 정도의 육체활동이나 창작활동 등의 수단을 통해 적극적으로 감정을 해소하곤 했던 나와는 달리 아내는 조금 무기력하게 감정이 사그라들길 기다리는 성격이었지만 아내에겐 결혼생활을 통해 받는 감정적 자극들이 본인이 해소할 수 있는 양보다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에겐 이혼이 공허로 남았지만 본인에겐 탈출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겠지. 사람인 이상 우선은 살고 볼 테니까. 


아내는 이따금씩 화를 내곤 했는데 한 날은 왜 설거지가 쌓여있는데 하지 않느냐며 기이할 정도로 화를 냈다. 그땐 나도 참지 못하고 왜 당신은 하루종일 그걸 보고도 굳이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 화를 내느냐고, 내가 혼자 먹었냐며 화낼 이유가 필요한 거면 그럴듯한 걸 좀 가지고 와서 내보라고 되려 화를 냈다. 


나는 요리도 내가 하지, 직장도 멀고 일도 늦게 끝나서 집에 오면 뭘 북닥거릴 생각 자체가 없었고 아내 입장에서는 출근 전까지는 그냥 쉬고 싶은 마음인데 갔다 오면 돌봄 선생님이 아이를 봐주시는 동안 또 쉬고 싶지, 그러다 보면 내가 와있지, 근데 자기 씻고 그냥 잘 준비를 하니 뭔가 혼자 답답하지 않았을까.


이윽고 집이 조용해지자 나는 평온함을 느꼈지만 아내는 아니었겠지. 그걸로 화내보려고 그렇게 기다렸을 텐데 찍어 눌렸으니 또 안으로 곪아 들어갔겠지. 지나고 나서야 짐작 가는 일들이 참 많다. 


후회하나. 아니. 그냥 안타까워할 뿐. 애초에 고작 그런 일들로 서로 목소리를 높여야 할 만큼 대화체계가 망가져있던 그 젊은 부부가 불쌍한 거지. 


화가 원인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단지 내가 그런 감정들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면 아내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오히려 희망에 가까운 아쉬움이 있다. 


서로 많이 다른 사람이었기에 이해하는 능력이 더 필요했고 부족함 역시 크게 드러났으며 그 과정에서 받은 상처만큼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이 조금은 더 생겼지만 대신 비싼 수업료는 내야 했지. 


화는 누구나 가진 능력이다. 


개인 천성이나 경험에 따라 크기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화를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흔히 화를 내는 사람을 공격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화라는 감정은 자기 방어에서 기인한다. 화는 자신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가진 본능이며 평소보다 대사가 올라가는 건 빠르게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함이다.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르는 건 포식자의 위협이 아니라 먹잇감의 비명이다. 일종의 구조신호다. 그 정도가 강할수록 자신이 고통과 위협에 처했다는 신호다. 


포식자는 화를 내지 않는다. 어느 등신 같은 포식자가 먹잇감을 위협하겠나. 포식자는 조용히 사냥할 뿐이다.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사냥하는데 화를 낼 이유도 위협을 할 필요도 없다. 


화는 참을 필요가 없다. 본능이 가진 고유의 기능은 썼을 때 의미가 있고 애초에 이유가 있는 기능이다. 만약 어느 상황에서 자신이 화를 내고 있다면 나는 우선은 그 상황을 잠시라도 벗어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위험신호이기 때문이다. 


잠시 여유를 찾았다면 왜 그 상황이 내게 위협적이었는지 한번 찬찬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 특성상 길에서 칼 든 사람을 만나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 생명과 직결되는 위협을 만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리적 위협이 없음에도 본인이 화를 내고 있다면 자기 마음이나 기억 어딘가에 새겨진 위협이 있다는 얘기다. 


나는 언젠가 아버지가 생전 내게 왜 그렇게 화를 내곤 했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그건 아버지의 성장환경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엄격하고 억압적인 가문에서 차남으로 자라며 많은 것을 통제당해야 했던 아버지는 본인의 억눌린 행동들을 나를 통해 풀고 싶어 했지만 나 역시 개인의 자아를 가진 독단적인 생물이었다. 


내가 본인을 거부할 때마다 마치 어릴 적 자신이 억눌리며 느껴왔던 것과 비슷한 억압을 느꼈으리라. 다만 나는 본인보다 약했고 더 가까웠기에 자신의 분노를 더 표출하기 쉬웠겠지. 자신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에게 당했던 물리적, 정신적 폭력이 그대로 드러났겠지. 


모른다. 본인이 시인한 것도 아니고 이제 와서 물어볼 수도 없는 사람이 돼버렸으니. 그저 나 역시 아빠가 된 후 짐작해 보는 부분일 뿐이다. 


나는 왜 화라는 감정을 그저 외면할까, 혼자 오랫동안 고민하며 괴로웠던 기억들과 마주한 후 알게 된 생각들이다. 적어도 내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까지 화를 내본 적은 없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다. 


희화화는 내가 어릴 적부터 가장 오랫동안 사용했던 가장 효과적인 방패이자 부작용 역시 심했던 불완전한 방어기제였다. 


난 원래 유머가 좋은 사람이다. 개그맨을 꿈꿔본 적은 없지만 갑자기 10명 앞에 떡하니 던져놓고 대뜸 웃겨보라고 해도 여섯일곱 정도는 웃길 자신이 있다. 꽁트보다는 스탠드업 쪽이지만 몸으로 웃기는 것도 제법 잘한다. 


난 그렇게 양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억압적인 유년기가 유독 힘들게 느껴졌었지만 낙천적이고 웃는 걸 좋아했던 성격 덕에 위험한 고비들을 곧잘 넘길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힘든 상황이 와도 어떻게든 밝은 면이나 웃음포인트를 찾아내어 늪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게 너무 발달한 거지. 보통 사람들 같으면 당연히 기분 나쁠 상황이 와도 혼자 웃고 있을 때가 많으니 그게 상대방 입장에서는 조롱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굳이 실실 웃고 있는 상황까지 갈 필요 없이 내가 별 반응이 없는 정도만 해도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된다. 문제가 조금 있어 부하직원을 불러서 혼을 냈는데 별 표정변화가 없는 거다. 상사 입장에서는 속 뒤집어지겠지. 


좀 어릴 때는 무서운 척이라도 했는데 어느 정도 나이도 차고 경험도 생기니 가끔은 사람에 따라 치와와가 앞에서 양양거리고 있는 느낌이 들어 같잖을 때도 있다. 표정에 드러났나 보지 뭐. 


그래도 나이 먹으면 사회성이라는 게 생기니 10분 정도야 그냥 참을 수 있지만 꼭 이걸 장타로 끌고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시간 지났다 싶으면 슬슬 나도 입이 열린다. 


왜 실수했냐. 실수인 걸 알고 하는 사람이 있겠나, 당연히 일이 서투니까 실수하는 거지. 잘했다고 하는 소리냐. 잘했으면 지금 불려 와서 이런 소리 듣고 있겠냐, 못했으니까 불러서 얘기하시는 거 아니냐. 그럼 잘하지 그랬냐. 시간 지나면 누구나 잘한다, 애초에 딱 능력만큼 월급 받고 있는 거 아니냐. 너 잘해서 그 월급 주는 줄 아냐. 그럼 깎으시라. 


물론 이보다는 나이스하게 대화하겠지만 의도까지 숨기진 않겠지. 이게 어느 특정 문화 안에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길러진 사회성이었으면 저 상황에서 저렇게 나갈 대화가 아닌데 방어기제가 편향적으로 발달하면 저런 말 같지도 않은 대화가 실제로 오간다. 


오히려 군대에서 더 편했고 인정받았던 건 상하관계와 하루하루 해야 할 과제가 명확했던 생활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직장생활에서 주어지는 과제는 대개 생각보다 단순했고 상하관계에 대한 강제성보다 이탈이 더 편했기 때문에 직장 내 사람들과 하릴없이 관계를 맺으며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 갑갑했다. 


이렇게 말하면 엄청 부적응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첫 직장에서 5년이나 보냈던 걸 보면 나름의 끈기는 있다. 결국 개인사업을 시작하게 됐지만 지금처럼 종종 어느 직장에서 일을 해도 특별히 다른 이유가 생기지 않는 이상 집단생활 자체를 못 견디진 않는다. 


화를 비롯한 다른 감정들 역시 타인과 섞이면서 겪는 감정이다. 동시에 나를 알 수 있는 기회다. 


아이러니하지만 나를 알려면 계속 어떤 상황에 놓이며 마찰을 겪어야 계기가 생기고 그걸 경험하는 과정에서 나를 조금 더 잘 알게 된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만큼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 역시 자연히 넓어진다. 


나는 상담사님께 내가 화를 내게 되는 상황 자체가 싫다고 대답했었다. 상담사님은 화를 내는 건 잘못된 게 아니라고 대답해 주셨다. 대부분의 상담사님들이 그러하시듯 정 힘들 때 한 번씩 쓸 수 있는 기술 정도는 몇 가지 알려주셨지만 전체 가이드는 해주시지 않으셨다. 


정답보다는 나를 알아가는 과정과 그 과정 속으로 걸음을 디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답이라는 건 그때그때 바뀌는 거니까. 그 용기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만큼 자연히 길러지는 듯하다. 믿음은 내가 나를 아는 만큼 생긴다. 돌고 도는 회전목마. 


그래. 화낼 때는 화내는 한이 있더라도 그냥 닥치는 대로 살아가자. 뭐 안되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보지 뭐. 그렇게 생각한 후로 조금은 더 많은 일을 겪게 됐지만 결국에 다시 알게 된 건 무슨 일을 겪든 나라는 사람은 어지간해서는 화를 잘 안 내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딱히 걱정할 게 없어지니 되려 마음은 더 편해졌고 그럴수록 또 화가 줄어드는 선순환 속에 지금도 살고 있다. 그래도 화낼만하면 내자. 그 생각은 여전히 내가 내게 열어주는 창문이다. 


때로는 그저 창문이 열려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한 것처럼. 그 정도만 돼도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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