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분이 넘었을까.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다니는 소리, 아이들이 앳된 방식으로 얘길 나누는 소릴 들으며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는 외국인이다. 몇 년 전 한국에 왔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딸을 낳아 살고 있는데 아내와 사이가 조금 애매한 상태다. 본인은 괜찮고 아내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별거 중이다. 아 뭐 그럴 수 있지. 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
아빠를 많이 닮아 한국애들과 섞이기 힘든 딸은 주말에 같이 놀 친구가 적은데 우리 딸이 유독 그 아이를 좋아해 종종 같이 만나 놀러 다닌다.
마침 근처에 축제가 열려 같이 가자는 친구의 제안에 그렇게 모였는데. 애들은 마냥 신났지, 애아빠는 저기 뭐 신기한 거 있다고 자기 혼자 보러 갔지, 금방 온다더니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며 나는 한숨만 픽픽 쉬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지루할까 봐 애들 입에 색깔 다르게 슬러시를 하나씩 물려놨더니 서로 자기 색깔을 자랑하며 신났는데 그것도 잠깐이지.
삼촌, 근데 아빠는 어디 갔어요? 친구네 딸이 묻는다. 그러게다. 너네 아빠가 오늘 신났네, 아빠가 사고 싶은 게 있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아이에게 말해주자 아이는 자기도 사고 싶은 게 있다며 자기가 아까 본 예쁜 핀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내 딸도 자기가 본 인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삼촌, 저기 봐요, 쟤도 나처럼 혼혈이에요. 물끄러미 본 곳엔 조금 다른 외모를 가진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지나가고 있었다. 혼혈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구나, 왠지 모르게 뜨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게.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머릿속에서는 그때까지도 나타나지 않는 친구의 빵댕이를 몇 번이나 걷어차고 있었다.
이윽고 친구가 돌아왔다. 한 손에는 검은 봉지가 덜렁거리는 걸 보니 몇 개 주워 담았나 보다.
자기가 뭘 샀는지 줄줄이 자랑한 뒤 친구는 아이가 먹고 있는 슬러시를 보면서 삼촌한테 고맙다는 말 했냐고 추궁하고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나는 됐다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까 했어" 사실은 안 했지. "아 그래?" 안 했을 거 아니까 그랬겠지. 너나 잘해라.
한참 돌아다녀서 애들도 이제 피곤하고 가기 전에 다 같이 좀 앉아서 밥이나 먹자고 그랬더니 자기는 배 안 고프단다. 먹기 싫으면 그냥 옆에 앉아있으라니 알겠단다. 똑바로 가도 10분은 걷는 걸 또 저거 한 번만 더 보자고 지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다 결국 30분 뒤에야 밥 먹는 곳에 도착했다. 어느 천막에 들어가 메뉴를 고르는데 아이들이 소시지를 먹는다고 하니 그런 거 먹지 마라고 또 뭐라 한다. "애들도 배 안 고프대" "근데 쟤 점심 안 먹었어" "그래도 안 고픈가 보지"
친구는 자기 딸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진짜 배 안 고픈 거냐고 묻는다. 야이 미친놈아, 80년대 형사냐. 우선 소시지를 사 줄 테니 이따 배고프면 다시 말하라고 아이들에게 말하자 아이들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소시지 생각에 들떴다.
그래놓고 지는 2만 원짜리 소고기 비빔밥을 시키는 걸 보며 다음번 만남은 가능한 천천히 잡아야겠다고 조용히 다짐했다. 아무리 친구라도 양육방식이 달라지면 정말 같이 있기 힘들어진다. 아이를 위한 행동이랍시고 친구 아이한테 내가 너무 개입을 해버리면 친구 기분도 상하고 아이도 혼란을 느낀다. 보는 나도 스트레스받고 내 딸한테도 영향이 간다.
소시지를 다 먹은 딸은 김치를 물에 넣었다 빼며 장난을 치고 있었고 친구네 딸은 아빠가 더 먹으라고 준 어묵탕을 쿡쿡 쑤시며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친구가 빨리 먹으라고 보채자 마지못해 한 숟갈 더 먹는다. 배부르냐 물으니 대답을 하지 않는다. 배가 불러서 더 먹기 힘든 거면 그만 먹어도 된다고 말하니 잠시 생각하다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친구에게 그낭 일어나자고 말하자 친구도 말없이 일어났다.
지 혼자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걸 보며 또 한숨이 나온다. 조용히나 걸어가지 이따금씩 뒤돌아보며 빨리 오랜다. 야 인마 내 양손에 애들 있다고. 너나 나나 키가 몇인데 그 걸음을 애들이 어떻게 따라가냐. 내가 인상을 쓰자 친구가 뻘쭘했던지 다시 앞을 보고 걸어간다.
내가 나한테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그 당시엔 뭔가 이상한 걸 느껴도 감정만 어렴풋이 알아챌 뿐 뭔지 정확하게 알아내진 못한다. 집으로 돌아와 쉬다 보니 다시 생각이 올라와 하나씩 되짚어봤다.
말할까 말까. 별로 길지 않은 고민이다. 말하자. 계속 볼 사이면 더더욱 말하자. 그럼 어떻게 말할까. 여기서부터는 조금 긴 고민이 이어진다.
서류를 전해주러 온 친구에게 잠깐 시간이 있냐 하니 흔쾌히 괜찮다고 한다. 사실 우호적인 친구다. 다른 사람들 부탁은 기를 쓰고 피해 다니면서 내가 부탁하면 다른 사람이 된 것 마냥 쿨하게 들어주는 면이 항상 고맙다.
불평도 아니고 충고도 아니니 그냥 내가 본 거 들어주는 정도만 해달라는 부탁, 그냥 제안 정도로만 들어달래니 뭔 일이 있나 싶어 토끼눈을 뜬다. "너 너무 빨리 걸어" 토끼눈 모양이 조금 바뀐다. "너무 빨리 걷는다고"
"아 미안, 내가 원래 조금 그래" "너나 나나 키가 크니까 다 보이지. 애들은 어른들 빵댕이만 잔뜩 보이는데 그 짧은 다리로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걸어야 돼. 네가 생각하는 거보다 훨씬 시간 걸려" "아 그 생각은 못해봤다" "그냥 네 딸 옆에서 조용히 따라가 봐. 그러면 걔 속도가 있을 거야. 어찌 됐건 너보단 느리겠지" "나도 너무 신나서 그랬었나보다. 내가 그런 축제 잘 안 가봤잖아" "그런 거 같아서 말은 못 했는데 애들 놀라고 간 거니까. 뭐 그렇지 뭐. 혼자 보고 싶으면 혼자 가야지. 너무 신경 쓰지 마. 근데 좀 빠르더라고. 알고만 있어 봐"
"그래도 네가 애들 잘 봐줘서 고마웠어. 다음번에 따로 밥 살게" "내가 너 연장 사러 한참 없는 동안 애들 데리고 너 기다리고 있었잖아" "아 그거 진짜 미안해" "아니 사과 듣자는 게 아니고. 내가 그거 기다리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뭐?" "네 와이프가 맨날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친구 표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내 와이프도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뭐 그런 생각 들더라고" 조금 더 가라앉았다. 우리는 말없이 그냥 허공을 보고 있었다. "좋은 아빠니까 걱정하지 마. 잘하고 있어" 누구한테 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애들한테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도 조금 시간이 필요하겠지" 친구는 한숨을 쉬더니 주먹인사를 하고 어찌 됐건 고맙다고 말을 하며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