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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온 Oct 15. 2023

시간

축복일까 저주일까

아내는 언젠가 내게 시간이 너무 빨리 가고 아이가 자라는 것이 무섭다고 했다.


아이에게 더 좋은 것을 해주고 싶지만 우리는 능력이 없고 아이가 부족하게 자라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 싫다고 했었다. 그래서 이혼을 원한다는 말을 이었다.


이혼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그리고 솔직히 뭐가 부족한데. 우리가 지금 생활비를 걱정해, 뭘 걱정해. 이 나라에서 굶어 죽는 사람은 어딨고 딴에는 잘난 사람들이라고 우리 입으로 말하고 다녔는데 막말로 뭘 해도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걸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여.


그러니 안 맞는 거라고. 이혼하는 게 낫다는 말을 끝으로 아내는 대화를 끝냈었다.


시간은 축복도 아니고 저주도 아니다.


돈과 시간은 닮은 구석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지만 돈 역시 행복도 아니고 불행도 아니다. 돈이 많은 누군가가 행복해 보인다면 그건 그 사람이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돈이 따라왔을 뿐이다. 물론 없던 돈이 갑자기 생긴다면 잠깐 기분 좋을 수는 있겠지. 그런 걸 행복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돈 때문에 불행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돈 때문이 아니라 원래 불행할 사람이 불행해야 할 이유로 돈을 선택했을 뿐이다. 돈은 죄가 없다. 만약 누군가 없던 돈이 생긴 뒤로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결국 파탄으로 몰렸다면 그건 애초에 있던 불행의 씨앗이 돈으로 말미암아 자라났을 뿐이다. 본인이 가지고 있던 씨앗을 몰랐던 본인의 잘못이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지. 내가 불행한 게 돈 때문인 것 같지. 칼 같은 거다. 칼은 누구 손에 들렸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비슷하지만 돈은 결국 시간의 하위호환이다.


돈은 문 앞까지 찾아와 벨을 누르는 경우가 드물지만 시간은 매 순간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다. 여기까지만 말하면 시간은 그저 모두에게 내려진 축복이니 소중히 해야 한다는 구름 위 자기 개발서 구절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준비되지 않은 누군가에겐 굉장히 잔인할 수도 있다.


입영을 하루 앞둔 젊은 친구들에게, 수능을 한 달 앞둔 수험생들에게,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졸업생들에게, 잘 나가는 친구들을 지켜만 봐야 하는 거북이들에게, 다음 달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에게, 갑작스러운 투병이나 사고로 앞날이 막혀버린 이들에게. 시간만큼 가증스러운 존재가 있을까.


돈은 원하지 않으면 거부할 수나 있지 시간은 그게 안된다. 안티에이징 해보겠다고 애먼 돈 그렇게 갖다 부어도 되나 그게. 돈 몇 푼으로 되면 그게 타임머신이지. 미쳤다고 물리학자들이 지랄염병을 해가면서 그 고민을 하나.


사람들이 뭘 하든 시간은 그냥 흐른다. 그래. 흐른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등신같이 살고 있으면 똥물이 흐를 거고 나름 잘 살고 있으면 맑은 물이 흐르겠지.


개인사업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시간이 갈수록 고객들이 시들해진다는 것이었다.


어지간히 괜찮은 아이디어로 사업을 시작했다면 처음엔 대개 잘된다. 처음 시작했으니 의욕도 있고 대부분의 경험들이 새로우니 도파민이 쭉쭉 나온다. 잠도 안 오고 피곤하지도 않다. 매 순간 새로운 아이디어가 번뜩이고 걸음에 망설임도 없다. 모든 장애물은 나를 성장시킨다. 그에 따라 고객들은 점점 늘어난다.


어느 순간 느낌이 온다. 처음에는 조금 루즈한 느낌이 들지만 그 정도는 기세로 이겨낸다. 약간의 위험은 그저 성취감의 재료일 뿐이다. 의외로 이런 게 몇 년 간다. 제법 길다. 기존 고객들이 줄지만 성장하는 나에 맞춰 새로운 고객들이 또 생기기 때문에 괜찮다. 이대로만 쭉 가주면 될 것 같고 확신도 있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슬슬 레퍼토리도 떨어지고 처음에는 안중에도 없던 남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슬슬 기웃거린다. 뭔가 엄청 잘 돌아가지도 않지만 이제까지 해오던 일이라 그럭저럭 돌아간다. 근데 이상하게 더 잘해보려고 하면 잘 안 먹힌다. 조금씩 기운이 빠진다.


그동안은 잠자코 있던 불안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쉽게 돌아가던 돈줄들이 하나씩 막히기 시작한다. 다행히 운 좋게 새로운 기회들이 생기지만 단지 운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불안이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고 조급해진다. 예전의 패기를 누르고 신중함이라는 무기를 한 손에 쥐기 시작한다. 이전까지 몰랐던 작은 상처들이 이내 모여 출혈이라고 부를 정도가 된다. 이전 같았으면 기회로 보였을 일들이 무서워진다. 신중해진 거라고 자위하지만 겁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점점 느려진다.


새로운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저돌적이고 거침없다. 밥인지 똥인지도 모르고 온통 주워 먹는 통에 시장에서 내 몫이 없어진다. 욕할 수도 없다. 내가 딱 그랬었으니까.


내 경우엔 이때쯤 아내가 소송을 걸며 모든 활동이 멈췄다.


과연 우연일까. 글쎄.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만약 사업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고 그저 희망차게 돌아가고만 있었다면 내가 딱히 멈추진 않았을 거라는 것. 잠깐 쓰러졌다 할지라도 이내 주섬주섬 일어나지 않았을까.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때였다. 바닥에서 묘하게 악취가 올라오는 느낌. 거기에 이혼소송까지 더해지자 나는 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몇 달 정도는 억지로 더 노력해 봤었는데 결국 그게 공황발작으로 돌아왔다.


난 의지가 강한 사람이다. 인내력 또한 좋은 사람이다. 필요하다면 밤을 새워가며 끊임없이 두드리는 것에 굉장히 능한 사람이다. 싸움을 좋아하진 않지만 도망도 가지 않는다. 친절하지만 비겁하지도 않다. 그러면 뭐 하나. 공황발작 한 번에 후다닥 들어가 몇 달 동안 집밖으로 한걸음도 못 나갔는데.


사실 공황발작이 오기까지 몇 달째 안정제를 기준치의 4배가량 먹어가며 버티고 있는 중이었고 복용량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몸도 화가 났던 거겠지. 적당히 쉬면서 재정비나 할 것이지 미련한 짓을 하고 있으니 엣다 먹어라 하면서 뚝배기를 날렸던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시간은 그런 거지. 애초에 잘못된 거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엇나간다. 경력자를 믿으면 안 되는 게 애초에 나침반이 고장 난 인간이면 고장 난 채로 오랫동안 삐딱선을 탔다는 얘기다. 내가 이 일을 얼마나 했는데, 어쩌고 하는 사람 말은 그냥 대충 걸러들으면 된다. 기간이랑은 상관없다.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방향이 맞다면 시간이 갈수록 더해진다. 만약 방향이 정답에 가깝다면 목표에 걸리는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다. 노력의 질이나 양과는 별 상관없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저 운으로 보일 정도다.


그래. 시간은 쓰는 사람에 따라 축복일 수도 저주일 수도 있다는 얘긴 너무 당연하겠지. 대개 이런 얘길 들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어느 쪽인지 가늠해보고 있지 않을까.


둘다입니다. 새옹지마라는 얘기 아시잖아요. 오늘의 축복은 내일의 저주고 오늘의 불행이 내일의 행운입니다. 당신이 그걸 행복인지 불행인지 정하는 건 오늘의 당신이 발 딛고 서있는 그 위치가 어디냐의 문제지 두어 걸음만 떨어져 보면 그저 살아가며 겪는 사건들일뿐이다.


나이를 먹는 게 두려운 건 당신의 현재에 무언가 불안한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빨리 가길 바라는 건 당신이 현재를 마주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가 아름다워 보이는 건 현재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가 비참한 건 당신의 현재가 과거를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비참했던 과거가 양분이었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방법이 있냐고. 찾아야지. 무책임한 말일수도 있지만 본인 인생을 왜 남한테 물어보나. 어쩌다 조언 정도야 구할 수 있겠지만 밥그릇 어딨어요, 숟가락 어딨어요, 쌀은 어딨어요, 밥솥 좀 빌려줄래요, 몇 번 씹어 삼킬까요, 똥은 언제 눌까요. 듣기만 해도 답답하지 않은가. 질문을 멈추는 건 본인의 몫이다.


당신이 원하건 원치 않건 시간은 흐른다.


당신의 실수를 씻어주고 당신의 업적을 무너뜨린다. 한없이 가벼운 것들은 단번에 쓸어가며 그나마 쓸만한 것들은 남겨준다. 작은 선행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없던 일로 만들고 어쩌다 한번 저지른 실수는 지워지는데 한참 걸린다.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다행인가 불행인가.


한 가지만 말해준다면 아무리 시간이 세찬 물살로 당신을 덮어도 당신은 남는다. 업적은 쓸려갔을지라도 업적을 만들기까지 노력했던 당신, 실수를 범했을지라도 선행을 하려 했던 당신, 비록 비참해졌을지라도 비굴하지 않았던 당신은 쓸어가지 못한다.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남을지라도 바른 것을 보려 노력하는 당신의 눈은 변함없다.


만일 시간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당신을 만난다면 그게 시간의 문제는 아님을 알려줘라. 시간은 그저 당신을 비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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