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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끄집어내는 아이들

암환자의 복직생활기

by 나즈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 쓴다.

수업준비 하려고 카페에 왔는데 주변이 시끄러워 음악을 틀었다. 질병휴직할 때 월요일마다 작가의 책상에 앉아 글 쓸 때 들었던 유튜브 채널의 음악이 나를 이 곳으로 오게 했다. 이 음악을 들으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동반사처럼 자판을 두드리게 되는 게 신기하다.

토요일에는 수업 준비하고, 일요일에는 일주일치 도시락 준비하고, 평일 학교 공강시간에는 공문 처리하며 평온하게 지내던 루틴이 깨진 건 1학기 말이었다. 학기말에 내년도 교육과정 편제표 제출, 시험 출제, 수행평가, 생활기록부 입력 업무가 몰려 루틴이 깨지고 말았다. 집으로 노트북을 가지고 오지 않겠다는 다짐도 깨져버리고, 수면 시간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학기말에는 가만히 있던 아이들도 눌러왔던 것을 터트리는 모양인지 학폭 사건을 뻥뻥 터트려댔다. 밴드부에서도 사건 하나가 있었고 그걸 처리하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며 지내던 학기말이 지났고, 방학 땐 그 몰아쉰 숨을 고르느라 가만히 지냈다.


그리고 다시 2학기가 시작되었다.

2학기에는 평온한 루틴 복원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수업에만 집중하고 다른 일은 최소한으로 하며 에너지를 아끼며 살리라 다짐했다.

이런 나의 결심을 무너뜨린 건 아이들이었다.

교육법령도 아니고, 교육청의 공문도 아니고, 교장 교감의 지시도 아니다.


중학교 3학년 교실에서 남학생이 쉬는시간에 시사인 잡지를 읽는 광경은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고등학교에서도 거의 없었다. 그 학생에게 시사잡지를 읽으면 생각이 많을텐데, 글 쓴 것이 있으면 가져와보라고 했다. 같이 토론해볼 수도 있고 글을 써서 생각을 정리해가면 좋으니까.

그렇게 제안해서 그 반에 세 명 정도가 글을 써서 가지고 오곤 했다. 글을 써오면 짧은 코멘트를 해주곤 했다. 그런데 그 녀석들이 글 쓰고 피드백 받는 것에 성이 안 찼는지 2학기에는 독서토론을 하고 싶다고 했다. 책을 한 권 정해서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했다.


독서토론 하고 싶다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잠시 주춤했다.

'선생님과 함께 책 읽기'프로그램을 만들어 프로그램에 참여할 선생님들 모집하고 그에 맞게 학생들 모아서 10여명씩 10팀, 100명이 책읽는 프로그램을 운영한 적도 있는 내가.


'나.... 최소한의 에너지로 살기로 했는데.... 방과후에 남아서 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 없을까?'


이런 걸 고민하는 내가 참 낯설게 느껴졌다.

고민 좀 하다가 그냥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 하자! 그 대신 다른 아이들도 하고 싶을 수 있으니 2,3학년에 공개모집 공고하고 하고 싶은 애들은 참여할 수 있게 하자!"


기회는 모두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수업 들어가는 2,3학년 교실에서 독서토론을 공지했다. 책은 토론거리가 많은 "공정하다는 착각(마이클 샌델)"으로 정했다. 책이 어려우니 아무나 덤비지 않을 것 같았다. 많은 아이들이 지원하지 않아도 되고, 글 써오던 세 명만 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공지는 하되, 적극적인 모집은 하지 않는 방식을 취했다.

독서토론 모집 포스터.jpg


"간식도 주지 않을 것이고, 책은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야 하고, 생활기록부에도 기록하지 않을거야. 정말로 책 읽고 토론하고 싶은 학생만 와. 아무런 혜택이 없어. 책은 어려운 책 읽을거야. 같이 읽고 싶은 학생만 와~"


이거 하면 뭐가 좋냐고 묻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답해주었다. 아이들을 유인하는 유인책을 다 생각해서, 그런 것들이 하나도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말했는데도 2,3학년 8학급에서 열 네명이나 신청했다. 주변 선생님들도 깜짝 놀랐다. 우리 학교 아이들이 독서토론을 이렇게 좋아했었나 하고.

독서토론 모임을 하겠다고 하자, 사서선생님이 도서관 예산으로 책을 구입해주셨다. 아이들에게 책을 나눠주며 책을 못 읽어올 학생이 있다면 지금 책을 반납하라고 이야기했다.

신청자 중에는 정말 책을 안 읽을 것 같은 아이들이 몇 있었다. 왜 신청했는지 그 의도가 너무 궁금해지는 아이들이었다. 친구들하고 같이 하려고 했을까?

독서토론 사전 모임에 한 명이 오지 않았다. 그 아이는 독서토론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친구들이 전해주었다.

안할 것 같던 아이가 안한다고 하니, 듣자마자 명단에서 그 아이 이름을 얼른 지웠다.

'그럼 그렇지.'


챕터 2까지 읽어오기로 하고 사전모임을 끝냈다.

한 명이 안 왔다며 책을 사서선생님에게 다시 드리려고 하는데, 사서선생님이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그 아이, 책 읽는 거 정말 좋아해요. 저도 처음엔 겉모습만 보고 그냥 도서관에 와서 기웃거리는건가 싶었는데 책 추천해달라고 해서 읽고, 또 다른 책 또 추천해달라고 해서 추천해주면 읽어오고 그래요."

"아, 그래요? 진짜 의외네요. 저는 그 아이가 왜 독서토론 신청했는지 진짜 궁금했거든요."


책을 들고 그 아이를 당장 찾아나섰다. 교실에 갔더니 과학실에서 오는 중이라고 해서 그 방향으로 가서 그 아이를 기다렸다. 계속 기다려도 오지 않아 다시 교실에 갔더니 자리에 있었다. 오는 방향이 달라 엇갈렸던 모양이다. 따로 불러내 독서토론에 함께 하자고 했다.


"너 책 읽는 것 좋아한다며? 평소에 수업도 잘 안 듣고 노는 것만 좋아하길래 독서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독서를 좋아한다니 니가 다르게 보여. 너 완전 반전매력이다."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구할수가 없어서 책을 못 읽을 것 같아 안한다고 했다고 했다. 책을 준다고 하니 좋아하며 하겠다고 했다.

'반전매력'이라는 말이 좋았는지 친구에게 자랑하며 들어갔다.


"야, 선생님이 나한테 반전매력이래...ㅎㅎㅎㅎㅎ"


그 날 이후 그 아이는 수업을 잘 듣게 되었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덧붙인다.


학교의 존재 이유

학교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곳이라는 생각을 2학기에 들어 더 하게 된다.

방학을 지내고 온 어떤 녀석은 방학 때 무슨 유튜브 방송을 봤는지 수업시간에 밑도 끝도 없이 정치 이야기를 했다. 어른들도 삶이 얼굴에 나타나곤 하는데 청소년기 아이들도 그렇다. 삐뚫어질거라고 마음 먹고 행동하는 아이들은 눈꼬리가 올라간다. 신기하게도 그렇다. 그 녀석의 눈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그 녀석이 개학하고 3주를 보내고 나니 눈꼬리가 다시 내려왔다. 예전의 귀여운 학생으로 되돌아왔다. 집에서 혼자 유튜브 보는 시간이 줄어든 탓이리라.


또 어떤 녀석은 윤석열이 탄핵되던 날,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우리나라 이제 망했어요."

세상 무너진듯한 얼굴을 하며 말하는 그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이고. 우리 00이가 나라 걱정을 많이 하네. 기특하네. 너처럼 나라 걱정하는 청소년이 있어서 나라가 그렇게 망하지는 않을거야."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녀석의 유튜브 정치 이야기도 줄었들었다.


학교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보곤 했는데, 이 아이들이 학교의 존재 이유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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