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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대리 Jan 06. 2019

갑질 안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광고대행사가 아닌 광고회사




대리로 진급한 후, 눈에 띄게 일이 많아졌습니다. 모든 광고주 미팅에 함께 참석하게 됐고 단독으로 협력업체와 컨택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그건 곧 실수해선 안 되는 일이 많아진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맘때 제 어깨는 늘 딱딱하게 굳어있었습니다. 퇴근하고서도 바짝 힘이 들어간 몸을 내려놓기 어려웠습니다. 부담감이 극에 달한 시기였습니다.


처음 같이 일하게 된 협력업체는 이 바닥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난 곳이었습니다. 광고주로부터 피드백이 오면 그 부분을 반영하여 정리하는 게 광고회사,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수정이나 보완을 하는 게 협력업체의 주된 일이었습니다. 워낙 동시에 돌아가는 일이 많았던 터라 그쪽과의 컨택은 제가 도맡았습니다. 담당자분은 저보다 5살 이상 많은 분이었고 조금 무뚝뚝하긴 하지만 맡긴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분이었습니다. 처음 진행해보는 부분이 많았던 제가 내부에 들키지 않고(?)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의 공이 컸습니다. 제작 부분에서나 스케줄, 예산까지 어느 하나 대충 넘어가는 일이 없었습니다. 광고주의 말도 안 되는 요구가 있을 때에도 그분의 태도는 남달랐습니다. 덕분에 큰 문제없이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렇게 꼬박 4개월이 지났습니다. 저는 최종 영상 편집이 끝나갈 무렵 한 통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덕분에 이번 고비도 잘 넘겼다고, 덕분에 일하는 내내 마음이 놓였다고, 정말 감사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자정이 다 돼어서야 온 그분의 답장에 이상하게 울컥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감사하다고 말씀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이 바닥에 오래 있다 보니 온갖 갑질을 다 당했거든요.
갑질 안 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다른 업계에 비해 갑을 관계가 자주 언급되는 이 바닥에선 황당한 대우나 무리한 요구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누가 봐도 동등한 파트너 관계조차 갑을 관계로 여겨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실제 일어난 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어이없는 사례들이 선배들 입에서 후배들 입으로 전해질 때마다 회의감이 들지만 그럼에도 저를 버티게 하는 게 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인턴 시절, 언제 입에 붙었는지도 모를 '광고대행사'라는 단어를 무심코 뱉었을 때, 한 번도 무표정 한 적 없던 어느 부장님이 건넨 말입니다.



우린 광고대행사가 아니라 광고회사야.
단순히 대행해주는 곳이 아니니까.
우리 스스로 생각을 바꿔야 대우도 달라지는 거야.
이런 생각의 차이가 결과물의 차이까지 만들 수 있는 거고.



어느새 팀장이 된 부장님은 광고주를 설득하고 그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을 합니다. 누군가의 생각대로 내가 움직일 것인지, 내 생각에 맞춰 주변을 움직일 것인지 그건 스스로 선택할 문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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