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에 '소비자'라는 개념이 생겨난 뒤로, 우리 소비자들은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관념'을 갖게 되었다. 더군다나 21세기에 들어 온라인, 모바일에 의해 확장된 시장은 넘쳐나는 상품(구색)을 제공하면서 완벽한 '선택의 자유'를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20년 가까이 리테일(소매) 업의 MD 일을 해온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완벽한 선택의 자유'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 소비자들은 나와 같은 MD를 비롯한 중개자에 의해 선택된 상품들에 대해서만 선택의 자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1개 점포 기준으로 백화점이 약 10만 개, 할인점이 약 5만 개의 구색을 제공한다. 물론 이커머스로 들어서면 구색의 양은 10배 이상으로 훨씬 많아진다. 하지만, 그중에서 소비자들이 실제로 접근하여 구매까지 이어지는 상품들은 POG(PLAN O GRAM)에 의해 계획적으로 전시 노출된 상품들로 제한된다. (주로 얼마나 많이 팔리는가를 기준으로 삼은 계획)
온라인 쇼핑몰에서 소비자가 검색을 하여 스스로 비교 후 선택한다고 해도, 검색의 결과에 이미 일정한 알고리즘이 적용되어 있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라는 개념은 온전하지 않다.
혹자는 이러한 제한된 선택의 자유를 중개자가 제공하는 큐레이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목적성과 지향성, 취향을 반영한 큐레이션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자. 그러면 이제 최근 버티컬몰들이 대유행하게 된 원인이 어느 정도 짐작되는가?
또한, 앞으로 커머스(좁게는 리테일)의 지향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대략 짐작되는가?
나는 졸저 <PROFESSIONAL 커머스의 조건>에서 역사적으로 시장의 변화에 보이는 흐름을 포착하고, 연속된 변화 속에서도 유지되고 있는 원형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찰하고자 노력했다. 오래된 역사를 굳이 들춰본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앞으로의 방향을 잡기 위해서이다.
나의 결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1. 역사적으로 나타난 시장의 변화는 '시장의 희소성'이 해소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전까지 시장은 필요에 의해 찾아가야 하는 일정한 장소였지만, 2006년 아이폰이 스마트폰으로의 세계를 열어낸 이후 희소성을 완전히 상실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희소성을 무기로 업을 유지하던 커머스의 참여자들이 도태하거나, 새로 생겨났다)
2. 시장은 수 천년 간 본질을 유지해왔는데, 그것은 바로 '광장'으로서의 원형이다. (고래로 시장에서는 거래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온갖 희로애락이 공존해왔다)
3. 시장의 혁신은 오직 '포맷'의 변화를 통해서만 발생되었다. (1852년의 백화점, 2차 대전 이후의 대형 쇼핑센터, 1962년 월마트를 필두로 한 할인점, 1996년 아마존을 필두로 한 온라인 쇼핑과 같은 거래 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가져온 포맷을 의미한다)
요약한 세 개의 어젠다를 통해 앞으로 커머스(리테일)가 나아갈 방향을 예상해보면 이렇다.
시장의 희소성은 이제 사라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차별성이 그 답이 될 것이며, 차별성을 획득할 방법은
1. '광장'으로서의 시장을 찾거나
2. '포맷'의 혁신을 찾는 방법이 될 것이다.
3. 희소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시장 운영자(혹은 플랫폼 운영자)와 중개인의 역할이 축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으로 우리는 메이커와 브랜드, 팔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스스로 플랫폼의 기능을 취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지원(SUPPORT)하는 일에 훨씬 더 중요한 비중이 주어질 것이다. 중개자가 아니라 서포터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광장을 지향하며, 판매방식(혹은 구매자와 판매자가 만나는 형태)의 혁신을 추구하고, 거래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하는 서포터.
지리멸렬한 쇼핑은 위와 같은 지향성을 갖는 리테일러에 의해 보다 재미있고, 보다 인간적이며, 보다 인간에게 유익한 쇼핑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