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마찬가지였다. ‘상품을 얼마나 매입해서, 어느 정도의 마진을 붙여 판매할지, 그렇게 하면 예상 매출은 얼마고, 인건비와 관리비를 고려해서 비용을 산출하면 영업이익이 얼마고, 순이익은 얼마 정도 남겠구나’ 하는 계산을 엑셀의 온갖 수식을 동원하여 최대한 정교하게 계산했다.
손익은 물론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첫 단계에서 고민하여 집중할 일은 따로 있다. 내 사업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 보는 일이다. 관련된 사람들, 일의 진행 과정 모두를 세부적으로 나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정도면 됐지라고 말한다
물론 이 정도는 대개 알려진 수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콘셉트 정도는 잡는다. 나도 그랬다. 대략의 콘셉트를 잡았다. (물론 당시에는 그조차도 상세한 콘셉트이라고 생각했지만)
베조스가 냅킨에 그렸다는 사업계획은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그저 냅킨에 순환 도식만 그려내고 생각을 멈추었을까?
그저 콘셉트를 잡는 정도, 그 콘셉트를 회사의 이름에 적용하는 정도의 수준이 되어서는 필패다.
대국적으로 생각하고 멀리 방향을 보면서, 착수할 때는 작은 형세를 세밀히 살펴 한수 한수에 집중함으로써 부분적인 성공을 모으고 키워 승리에 이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착안은 하되 착수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허상만 좇은 셈이다. 머리가 앞서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이다.
팥소 없는 찐빵이 찐빵이더냐
사업을 구상하면서 가장 중요한 첫 단추는 '문제'를 발견하는 일이다. 이는 거의 상식과 같다. '문제'를 발견하면 절반쯤 진척된 것에 해당될 만큼 문제에 착안하는 일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다. 나 역시 문제를 발견하자마자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와우 이거 대박인데' 하고 말이다.
하지만 착안 이후 세밀한 착수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대박은커녕 쪽박이 된다. 게다가 문제의 발견, 바로 그 직후에 해야 할 숨겨진 과정이 있다. 착안과 착수의 중간쯤에 위치한 과정이다. 이 과정은 자동차로 비유하면 엔진에 해당할 만큼 핵심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멋진 차체에 홀려 소홀하게 넘겨버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문제를 발견한다는 것은 시장을 발견하는 일이다. 시장을 발견하면, 유레카를 외칠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물어봐야 한다. "그러면, 시장 참여자들은 얼마를 지불할 수 있지?"
나는 꽤 유력한 소매유통기업인 백화점에서 근 10년을 일했었다.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면 과장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은 확실하다. 내가 당시에 발견한 '문제'는 분명 큰 문제였고,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다.
수많은 생산자들에게 주어진 판로는 매우 제한적이라는 문제이다. 나는 많은 제조사, 생산자들을 만나며 실제로 소매유통업으로부터 공급을 허용받는 이들은 극소수라는 점에 착안했다. 좁은 통로에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정교한 상품 기획이 내가 발견한 시장이었다. 관련한 소비자 측면의 문제도 묶어서 사업화한다는 생각이었다. 소수의 MD들에 의해 선택된 극소수의 상품으로 들어찬 마트 내에서의 식료품 장보기가 소비자들의 선택을 제한한다는 문제였다. 이렇게 두 가지를 묶어서 온라인 식료품 큐레이션 몰을 만들고, 병행하여 생산자들에게 저렴한 포맷의 상품기획 Tool을 제공한다는 것이 내가 착안한 시장이었다.
그럴싸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를 지불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이다. 소비자들에게 이러한 큐레이션 몰에서 (대기업 몰에 비해 검증되지 않아 보이는) 상품들을 구매하는데 얼마를 지불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생산자들 역시, 상품기획에 얼마의 비용을 지불할 것인지를 묻지 않았다.
2012년, 식품 카테고리는 이커머스에 진입하지 못한 상태였다. 2019년 기준으로 식품 카테고리의 이커머스 전이율은 여전히 13%에 불과하다. 소비자들은 이커머스에 열광의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지만 패션과 생활 아이템으로 제한된 시장이었다. 그러므로 컬리의 성공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내가 염두에 둔 신선식품(농수축산물) 지역 생산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상품 기획에 비용을 투입하는 것을 꺼려한다. 그것은 스스로 할 일이지, 남에게 맡길 일이 아닐뿐더러 조언을 구하는 것은 지인에게 부탁할 일이지 컨설턴트는 낯설기만 했다. (물론 백종원 씨 정도의 수준이라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요약하면 이렇다. 소비 측면과 생산 측면에서 문제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문제였던 것이다. 허상을 좇으면 실패는 필연이 된다. 문제를 찾아내되 거래 가능한 것인지를 따져봐야 하며, 열매를 상상하기 전에 뿌리를 튼튼하게 심어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