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인 꼬냑(Théodore-Ernest Cognacq, 1839-1928)이 결혼하여 이후 백화점 경영을 함께한 아내 마리 루이즈 제이(Marie-Louise Jay, 1838-1925)가 봉 마르셰의 넥타이 매장에서 일했다.
Ernest Cognacq peint en 1903 / https://fr.wikipedia.org/wiki/Ernest_Cognacq
Marie-Louise Jay 1903 / https://en.wikipedia.org/wiki/Marie-Louise_Ja%C3%BF
창업자 부부는 봉 마르셰의 창업자 부부와 마찬가지로 성공의 열매를 독식하지 않고 박애주의를 실천했다. 노점상이었으나 백화점을 키워낸 그들의 이름은 지금 박물관과 자선 재단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백화점은 창업자 이후 순조롭지는 않았다. 명맥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화재와 붕괴위험이 진단되어 2005년 문을 닫았고, 8년 넘게 폐쇄되어 있다가 2013년에 리뉴얼 공사를 시작했으며, 중단 위기가 있었으나 2020년 4월 완공되어 재 개점했다. 사마리텐은 현재 LVMH그룹이 소유하고 있다.
1871년에 문을 연 유서 깊은 이 백화점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장소로도 유명하다. <본 아이덴티티>에서 맷 데이먼(Matt Damon)이 퐁네프 다리를 내려다보는 곳이 바로 사마리텐 백화점의 옥상인데, 이 영화에서 사마리텐 백화점이 풀샷으로 잡히기도 했고, 퐁네프 다리와 파리의 시내풍경이 아름답게 촬영되었다. 또한 센 강의 풍경을 바라보며 식사할 수 있는 백화점 옥상 카페 투파리는 드라마 <파리의 연인>에서 기주가 태영에게 니스에 가자고 제안하는 장면의 배경이 된 곳이다.
그런데, 사마리텐이 출연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많은 이유는 실상은 퐁네프(Pont-Neuf)때문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며, 새로운 다리라는 뜻의 퐁네프는 1607년, 센 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석조 다리였으며 처음으로 보행자 도로가 설계된 다리였다. 양수기라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하여 처음 설치된 곳이기도 한데, 사마리텐의 이름은 바로 이 양수기에서 유래했다. 400년 역사의 최고 명소에 자리를 잡은 상점의 이름은 1813년에 철거된 양수기의 이름 사마리아에서 착안했는데, 상점의 위치가 바로 그 자리, 퐁네프의 북단이었기 때문이다.
창업자인 코냑은 열 두 살 어린 나이부터 생계를 위해 노점상으로 일했다. 여러 상점에서 잡다한 일을 하며 근근이 버텼는데 성실한 직원이었던 그는 동료들로부터 ‘포장풀기의 나폴레옹(Napoleon of unpacking)’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867년, 나이 서른이 되어서는 모아둔 저축을 모두 털어 자신의 상점 Au Petit Bénéfic을 열 수 있었지만, 금세 파산했다. 다시 노점으로 내려앉았는데 퐁 네프의 아치 밑에 행상을 차리고, 수건이나 티 타월 따위를 판매했다. 재기하는데는 4년이 걸렸다. 1871년 퐁네프 로(Rue du Pont-Neuf)의 작은 카페를 임대하여 사업을 재개한다.
맞은 편에는 피에르 파리소(Pierre Parissot)가 1856년 문을 연 그랑 마가쟁 라 벨 자흐디니에(À la Belle Jardinière)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다리 건너 백화점의 고객을 자신의 상점으로 유인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872년, 봉 마르셰 넥타이 매장의 판매원으로 근무하던 제이와 결혼했다. 상점의 이름도 사마리텐으로 바꾸었다.
퐁네프 맞은편의 피에르 파리소가 중류층 이하의 계층을 목표로 대중적인 머천다이징(파리소가 창안한 수공업 기반의 대량 생산 기성복은 저렴하면서 실용적인 서민의 의상으로 널리 보급되었다)을 추구한 것처럼 사마리텐도 대중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전략은 성공적이었으며 부부의 노력으로 사업은 성공 가도에 들어섰다. 3년 만에 임대했던 상점의 소유권을 샀다.
1875년 80만 프랑에 불과했던 상점의 매출은 1882년 600만 프랑, 1898년에는 5천만 프랑으로 성장했다. 제이가 세상을 뜬 1925년에는 10억 프랑을 돌파하면서, 백화점 업계에서는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매출액 순위 2위는 갤러리 라파이예트, 3위는 프랭땅, 4위는 봉 마르셰였다. 백화점 초창기 고급화를 통해 중상류층을 공략했던 선도자들보다 대중적인 사마리텐이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은 역시 전쟁 이후의 경제 상황 악화가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코냑과 제이는 사업의 성과가 커지면서 박애주의를 실천하는데 더 많은 공을 들였다. 1차 대전이 끝난 뒤인 1916년 코냑-제이 재단(Cognacq-Jay Foundation)을 창설하여 고아, 어린이, 실직자와 노숙자를 대상으로 한 자선 사업을 벌였는데, 현대에 들어서도 재단의 활동은 지속되고 있다. 부부는 1920년에는 전쟁 후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으로 매년 300명의 대가족에게 300프랑을 지원하는 프로젝트에 1억 프랑을 기부하기도 했다. 봉 마르셰의 경영 방침을 계승한 듯 1914년부터 직원들에게 회사의 주식을 양도하는가 하면, 이익의 65%를 직원들에게 재분배했다.
그들은 또한 열렬한 예술 수집가이기도 했다. 제이가 세상을 뜬 지 3년 후 코냑도 숨을 거두는데, 그해 1928년에 남긴 유언에 의해 부부의 평생 수집품들을 파리시에 기증하여 코냑 제이 박물관(Musee Cognacq-Jay)이 열렸다. 주로 18세기에 창작된 놀라운 컬렉션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