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내가 근무하고 있는 장소는 서울스퀘어 건물이다. 서울역을 마주보고 있는데, 과거에는 대우빌딩으로 유명했으며 드라마 ‘미생’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시간을 거슬러 약 100년의 시차를 넘어가면, 조선시대 칠패(七牌) 시장이 나온다. 오늘날의 남대문 시장(1935년에 현 위치로 이전)이다. 조선시대 종로의 시전(鍾街), 동대문 배오개시장(梨峴_이현시장_오늘날의 광장시장)과 함께 서울의 3대 시장으로 불렸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박제가(朴齊家)는 성시전도(城市全圖)에서 도성 삼대 시장을 소개했다.
이현(梨峴)과 종루(鐘樓) 칠패(七牌)는 도성의 삼대 시장이라네. 수많은 공장(工匠)과 생업인들이 모여들어 어깨를 스치고 온갖 물화가 이익을 쫓아 수레가 줄을 이었네.
이곳 칠패 시장에서는 경강으로 들어온 호남의 미곡과 동대문 훈련원의 배추, 청파의 미나리, 왕십리의 무, 삼남의 건어물 등 온갖 물품이 거래되었다. 그 중에서 어물전(魚物廛)이 가장 규모가 크고 활발하였다.(현재 남아있는 중림동 새벽 어시장이 그 흔적이다. 또한 이곳의 어물전이 1970년 노량진으로 옮겨졌으니 노량진수산시장의 원형이기도 하다)
칠패시장은 나라에서 세운 사대문 앞에 버티고서 전국의 물산이 한양으로 몰려드는 관문의 역할을 했으며, 또한 흥을 돋우기 위해 신명 나는 놀이판이 벌어지거나 씨름판도 열렸다. 서울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흥을 나누고, 서로 즐겼다. 때로 조정에서는 죄인들을 효수하여 본보기를 보이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모여드니 자연스럽게 온갖 소문과 이야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궁궐에서 벌어진 사건과 사고, 여느 집안의 출산과 결혼, 임종 등 도성 안팎의 온갖 화젯거리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다보니 칠패만큼 소문이 빠른 곳도 없었다.
칠패시장도 (우리역사넷)
칠패시장터(우리역사넷)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를 회상해봐도 골목 시장에서 사과를 골라주는 과일가게와 고등어를 토막내 손질해주는 생선가게의 주인 아저씨 혹은 아줌마는 아빠 친구이거나 엄마의 국민학교 동창이었다. 골목 시장의 상인들은 동네 어느 집이건 집안 사정에 밝았다.
조선 시대의 칠패 시장과 어릴 적 골목시장이 그러했듯 지금도 시장은 늘 사람들의 공간이다.
다만 이제는 ‘오직 거래만 존재하는 시장’이 득세하면서 오래된 시장의 원형을 찾아보려면 시골 오일장이나 플리마켓을 일부러 찾아가야 한다. 물론 사당동의 남성시장이나 봉천동 현대시장, 원효로 용문시장처럼 아직 동네 시장이 번성하는 곳도 있지만, 요새 아이들에게는 시장보다는 마트가 더 친근한 용어이다. 시장이 오직 거래만을 목적으로 사용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삽시간에 주류를 이루었다. 이제 시장을 따로 ‘전통시장’이라는 용어로 부를 정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지점이 바로 전자상거래, 온라인 마켓이다.
나는 가끔 근무하는 사무실의 창밖으로 과거엔 칠패시장이었던 광장을 바라본다. 지금은 중림동의 새벽 시장과 염천교의 구두 골목 정도가 과거의 시장이 남긴 작은 흔적일 뿐 자취를 찾아볼 수 없지만 시장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조선 시대 3대 시장이었던 칠패 시장 자리에 선 국내 유수의 전자상거래 기업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살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