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이 전설을 어떻게 만들어냈는지에 관한 길고 장황한 이야기이다. 100여 년, 수 대에 걸쳐 진행된 이 이야기는 성공 스토리라기 보다는 서사에 가깝다. 극적인 장면을 찾아내어 제목으로 뽑아내려면 꽤 높은 수준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공 사례인 것은 분명하다.
▶ 1849년에 설립된 170년 전통의 백화점이며,
▶ 전세계에 5개 뿐인 단일 점포 매출 2조 클럽 중 하나로서 여전히 건재한 백화점
▶ 곰돌이 푸 (Winnie-the-Pooh) 탄생의 영감을 제공한 어린이 장난감의 왕국
▶ 과거 영국 왕실 인장을 수여받은 백화점
2세기에 걸친 긴 세월 런던에서 최고급 백화점으로서의 위상을 지켜온 해롯 백화점의 이야기이다. 전설을 만들어내기까지, 아버지와 아들이 40년에 걸쳐 인생을 쏟아부었다. 그들은 식료품과 차 가게를 낸 뒤로도 30년에 걸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야 백화점을 선언할 수 있었다.
아버지 찰스 헨리 해롯과 아들 찰스 딕비 해롯
1. 구만 리 창천을 나는 대붕은 천 년을 기다려 단번에 날아오르는 것이다
창업자인 찰스 헨리 해롯(Charles Henry Harrod)에 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많지 않지만 그가 두 번의 큰 파도에 멋지게 올라타면서 해롯 백화점의 전설이 시작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홍차와 세계박람회였다.
1) 홍차 : 차별화의 늪에 빠지지 않고 대세에 순응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자수성가 스토리가 대개 그렇듯, 헨리의 시작도 보잘 것없었다. 13세에 양친이 돌아가신 이후, 런던 빈민가를 헤매던 수많은 올리버 트위스트들의 하나였던 헨리는 잡화점에서 노역에 가까운 점원 생활을 했고, 10여 년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독립하게 된다. 1824년, 25세였다.
헨리가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사업은 면직물의 제국인 영국 출신답게 린넨과 면을 취급하는 잡화 도매상이었다. 동업하던 친구와 결별하는 등 부침을 겪으면서도 10여 년 가까운 세월, 상인으로서의 수업을 거치게 된다. 그 사이 엘리자베스 딕비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고 아이들도 태어났다. 작은 규모였지만 꾸준히 걸음을 내딛던 헨리는 서른 다섯 즈음에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 홍차라는 큰 흐름에 올라타기로 한 결정이었다.
당시 영국은 이미 중국 차의 최대 수입국이었으며, 애프터눈 티와 하이 티(High Tea)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티타임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 이루어질 정도로 일상의 문화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17세기 초에 유럽으로 전래된 중국의 차는 특히 귀족들의 취향을 자극하며 상류층 문화의 하나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만, 끽다망국론(喫茶亡國論)이 일 정도로 상류층 귀부인들이 즐기는 사치스러운 티 파티(teaparty)에 대한 대중의 반발이 커서 보편적 소비를 가로막고 있었다. 차의 대중적 수요를 촉발시킨 것은 역시 18세기 중반의 산업 혁명이었다. 경제적으로 성장한 중산층이 차를 즐기게 된 것이다. 중국의 차는 이미 천 년 전 차마고도를 통해 티벳을 사로잡은 바 있었다. 불굴의 용사들이 살아가던 험준한 산악 국가 티벳이 중원의 왕조에 굴복하게 된 원인은 창칼이 아니라 차에 있었으니 차의 매력(혹은 마력?)은 이미 검증된 셈이다. 그로부터 다시 천 년이 흘러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바다를 건넌 차는 유럽인들, 특히 영국인들을 완벽하게 사로잡는다. 중산층 이상의 영국 사람들은 차 없는 문화 생활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에 빠져든다. 그들은 하루에 6차례나 티타임을 가질 정도로 홍차를 탐닉했다.
헨리가 차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일견 당연해보이지만 "차별화의 늪"이라는 측면에서 한번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창업자들의 상당수는 차별적 상품 혹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본류없이 지류가 생겨나지 않듯, 근본없는 차별화가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신참자들이 차별화를 노리는 이유는 시장을 선점한 경쟁자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야 성공할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이겠으나, 변형과 응용은 기본기없이는 불가능하다. 섣불리 차별화를 노리기보다는 차라리 1등을 좇아가는 모방 전략이 성공적일 수 있다. 틈새와 차별화를 고민하고 있다면 우선 기본기의 튼튼함을 점검해야 한다.
헨리는 차별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대세에 따르는 선택을 과감하게 추진한다. 사업의 중심 품목을 면직물에서 차(茶)로 전환한 것이다. 1883년 동인도회사의 아시아 무역 독점권마저 무력화되면서 동시에 차에 대한 독점권도 사라지게 된 것이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독점권이 회수되면서 차 무역에 대한 개인 기업들의 활동폭이 커지면서 유통(중개, 도매, 소매)에서도 기회의 틈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헨리는 동인도회사 독점권 회수 1년 후인 1834년, 아내 엘리자베스 딕비와 함께 케이블 스트리트(Cable Street)에 차 가게를 열고 질 좋은 차를 가져와 판매했다. 지역 주민들로부터 신용을 얻는데 주력하고, 곁들여 식품류로 구색을 확대했다. 워낙에 큰 수요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차류를 취급하는 도소매 사업은 순항했다. 그렇게 다시 15년을 보내면서 내실을 다졌다. 물론 사업 규모는 아직 지역의 소규모 상권을 감당하는 정도였다.
유럽 최고 해롯 백화점의 명성을 쌓을 기회는 헨리의 나이 50세, 사업을 시작한 지 25년이 지나서야 찾아온다. 봉 마르셰의 창업자 부시코가 40년에 걸쳐 도약을 준비했듯, 헨리 역시 차근차근 길을 닦고 있었다.
2) 세계박람회 : 나이츠브릿지(Knightsbridge)에 매장을 열다 (1849)
헨리의 눈 앞에 찾아온 도약의 기회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규모의 물결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열리는 세계 박람회 개최 소식은 황소 걸음을 걷던 헨리의 가슴을 뛰게 했을 것이다. 헨리는 박람회 개최 장소인 하이드파크(Hyde Park)로 달려간다. 철골과 유리만으로 지어올린 거대한 수직 건물 앞에서 헨리는 미래의 해롯을 떠올렸을 것이다. 같은 시기, 파리에서 건너와 수정궁의 위용에 감탄하던 부시코가 쇼핑의 성전 봉 마르셰를 결심 했듯, 소매업의 매장에서 잔뼈가 굵은 노장 헨리도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헨리는 인근 나이츠브릿지 지역, 브롬튼 로드(Brompton Road)에 위치한 작은 상점을 임대하여 자신의 매장을 열게 된다. 아직 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작은 마을 지역이었지만 과감한 선택을 한 것이다. 1849년. 해롯 스토어가 공식적으로 창립한 해이다. 수정궁(Crystal Palace)으로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은 제 1회 세계 박람회가 열리기 2년 전이었다.
1849 년 Charles Henry Harrod의 가게에 대한 작가의 인상 / 1949 년 Harrods 100 주년을 위해 제작 (Source : Getty Images)
헨리의 예상은 적중하여 나이츠브릿지 지역은 부유층 거주 단지로 개발되었으며 당대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거주지를 옮겨오며 런던의 명소가 된다. 이 지역은 해롯을 유럽 최고 수준의 백화점으로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하비 니콜스(Harvey Nichols) 백화점의 성장 기반도 제공했다. 만다린 오리엔탈 (Mandarin Oriental), 버클리(The Berkeley)와 같은 유명 호텔도 나이츠브릿지에 있다.
박람회 이후 헨리는 차 외에도 고급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구비하여 본격적으로 매장 규모를 확대해나갔다. 세계의 패권 국가 영국, 수도 런던에 거주하는 중산층 이상의 영국인들은 대영제국인이라는 심리적 자부심 뿐 아니라 탄탄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왕성한 소비력을 발휘했다. 매장의 매출은 불 처럼 일어났다. 임대했던 매장을 인수했고, 이웃 상점도 인수하여 확장을 거듭했다. 고급 홍차에 강점을 가진 해롯 스토어는 지역 주민들에게 다기(茶器)를 비롯한 다양한 생활잡화를 제공하면서 명성을 쌓아갔다.
헨리는 62세가 되던 해, 아들인 딕비 해롯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면서 일선에서 물러난다. 훌륭한 시작을 만들어 준 창업자는 그 뒤로도 2년 더 상점을 돌보며 일했다. 아들 딕비의 경영 수완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 슬하에서 배워온 터라 흠잡을 데 없을 만큼 성장한 상태였다. 1861년이었다.
2. 행동이 반복되면 운명이 된다
1) 약속을 지키는 해롯
딕비는 아버지 헨리의 전철을 밟아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뚜벅뚜벅 걸어갔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출현한 소비자 그룹인 부르주아, 전문직 중산층들이 탄탄한 수요를 형성하며 해롯은 꾸준히 성장했다. 인접 건물 2채를 추가 매입하여 확장을 거듭했으며, 1880년 드디어 백화점을 선언한다. 이후 21세기 글로벌 Top 5 백화점 중 하나인 해롯 백화점의 역사가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백화점을 공식 선언한 2대 사장 딕비의 경영능력이 빛을 발휘한 때는 그로부터 3년 후이다. 1883년 겨울, 기껏 어렵게 지어올린 건물이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인접 건물들을 인수하며 이어 붙인 형태의 백화점 건물이 모두 타서 재만 남았다. 상품도 모두 사라진 상황이었지만, 크리스마스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잿더미 앞에서 딕비는 절망보다는 약속을 먼저 떠올렸다. 이미 약속된 크리스마스 선물 주문이 먼저였다. 아버지 대로부터 쌓아온 상인의 신용을 잃으면 재기는 불가능할터였다.
건물 재건에 앞서 딕비는 새로운 상품을 사입하는 일에 착수했으며, 모든 주문에 대해 크리스마스 전에 배송을 완료한다. 런던의 많은 신문들이 이에 대해 우호적인 기사를 쏟아냈고 화마를 이기고 약속을 지켜낸 해롯의 명성은 높아졌다. 비슷한 시기, 파리의 프랭땅이 화재 속에서도 직원을 먼저 구한 쥘 잘뤼조 사장의 영웅담으로 유명해졌듯이 해롯도 화재를 계기로 불처럼 일어났다. (런던이 1666년 대화재 이후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 파리 프랭땅백화점, 조선 경성의 화신백화점이 초기에 모두 화재로 전소된 뒤 재건하여 더욱 큰 성장을 이루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소멸과 재생의 지극히 당연한 인과에 절로 숙연해진다)
그 해 겨울이 지나자마자 딕비는 바로크 스타일의 웅장한 5층 건물로 해롯을 재건한다. 현재 볼 수 있는 진정한 해롯 백화점은 사실 1884년에 태어났다고 봐야 한다. 딕비는 드디어 쇼핑의 성전을 구축했으며,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는 백화점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카테고리로 영역을 확장해나간다. 고정 고객이며 런던의 유명 인사들로 한정하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신용판매를 시행하기도 했다. 훗날 해롯 백화점의 모토인 "Omnia Omnibus Ubique" (All things for All people, Everywhere)는 딕비의 해롯에서 기원했다.
하지만 딕비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딕비는 그로부터 약 9년 간 더 회사를 운영했다. 스무 살에 시작했으니 30년의 긴 세월이었지만, 은퇴할 무렵의 나이는 불과 50세로 너무 빠른 은퇴였다. 건강이 좋지 못했다. 선택을 해야할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온 것이다. 게다가 후계자도 갖지 못했다. 7남 1녀, 여덟 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아무도 기업 승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7녀 중 단 2명만 결혼을 한 상태였으며, 외아들 헨리 허버트 해로드는 이제 막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지만 동화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에 열정을 쏟는 반면 경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딕비는 결국 회사 지분의 매각을 선택한다.
1889년 Harrods Srote.LTD (해롯스토어 유한회사)가 설립되었으며, 한동안 혼선을 겪다가 1891년 새로운 경영자가 등장한다. 해롯 가문이 후계자를 세우지 못하여 가족 경영의 대는 끊어졌지만, 해롯의 미래가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전문 경영인이 새로운 길을 개척해냈다. 3대 가족 경영의 성공사례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에서 새로운 경영자는 해롯의 명성에 오히려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2) 두 번째 가문 : 해롯 가문의 은퇴와 새로운 경영자 버비지
새롭게 해롯 스토어의 경영을 맡은 이는 영국에서는 최초의 백화점인 휘틀리(Whiteley, since 1863)에서 일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은 관리자 리처드 버비지(Richard Burbidge, 1847~1917)였다. 그는 상품과 서비스 운영에서 다양한 혁신을 시도함으로써 해롯에 신선한 피를 수혈했다. 헨리가 기틀을 세우고, 딕비가 백화점으로서의 첫발을 디디며 길을 닦았다면 버비지는 본격적인 성장의 시대를 열었다. 버비지의 목표는 단순했다. 해롯을 "고객이 원하는 모든 것을 제공하는 백화점"으로 포지셔닝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해롯의 모토인 "Omnia Omnibus Ubique"을 실제로 구현하는 일이었으며, 역대 경영자들이 꾸준히 추진해온 일이기도 했다.
버비지는 해롯을 런던의 랜드마크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으며, 매력적인 프로모션을 벌리는 일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영국인들 뿐 아니라 영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열광하는 해롯의 박싱데이가 바로 이 때, 1894년에 태어났다. 영국 크리스마스의 전통이 된 해롯 윈터 클리어런스 세일(12.26~익년 1월 말)의 제 1회차가 개최된 것이다. 당시의 해롯은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상품 중 하나인 봉제인형 테디 베어를 처음으로 판매한 백화점이기도 했다. 1906년의 테디베어는 이후 장난감 왕국 해롯의 명성을 쌓아가는 주춧돌이 되었다.
버비지는 또한 영국에서 최초로 백화점 내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해롯의 에스컬레이터는 1시간에 4천명의 쇼핑객 혹은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고 전해진다. 1902년에는 당대의 유명 아티스트 William Neatby에게 의뢰하여 식품관 바닥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덜튼(Doulton) 타일 장식의 디자인을 설치하기도 했다. 해롯 식품관 바닥은 현재 문화재에 등록되어 변형이 불가능하다.
1912년 발간된 카탈로그 "Harrods for Everything"은 1,525페이지에 실린 15,000개 이상의 상품으로 유명했다. 1,000페이지 넘는 시어스 카탈로그와 비교할 때 양적, 질적으로 밀리지 않는 카탈로그였다. 고객이 원하는 모든 것으로 제공하겠다는 해롯 백화점의 자부심이 방대한 분량으로 표현되었다. 해롯은 카탈로그에서 방대한 상품의 목록 중 어느 것을 골라도, 세계 어디든 배송될 것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버비지가 경영자로 등장한 1891년부터 5년 후인 1910년까지 20년 간의 매출은 12,500파운드에서 210,000파운드로 1,680%증가했다. 이후 성장은 계속되었으나 1914년 1차 대전이 발발했다. 리처드 버비지는 1차 대전 중 해롯을 병참 물품 생산기지로 제공하는 등 공로를 인정받아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백화점 경영에서는 물러난다. 1917년, 아들 우드맨 버비지(Richard Woodman Burbidge, 1872~1945)가 경영권을 승계한다.
리차드 버비지 경과 아들 우드먼 버비지 경
아들 버비지는 대표 취임 첫 해인 1917년에 애완동물 판매부서를 신설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이어나갔고, 백화점 최초로 개인용 비행기를 판매하기도 했다. 애완동물 매장에서는 극작가 Noel Coward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악어를 구매하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우드맨 버비지는 아버지가 구축한 궤도를 이탈하지 않으면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노력했으며, 당대에 어깨를 견주던 셀프리지스보다 매출 규모와 명성에서 한 발 앞서 있다는 평판을 얻을 수 있었다.
1917년에 경영권을 승계할 당시, 신생 업체로 무섭게 성장하던 셀프리지스 백화점(1909~)의 해리 고든 셀프리지 (Harry Gordon Selfridge, 1858~1947)가 10년 짜리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결과적으로 승리한 것이다. 해리 고든은 1917년부터 10년 동안 어느 백화점의 매출이 더 클 지 내기를 걸었고, 1927년에 버비지의 승리를 축하하며 은쟁반을 보내주었다.
우드맨 버비지는 1935년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은퇴한다. 3대 버비지(Richard grant woodman burbidge)가 경영하던 시기는 다시 전쟁과 혼란의 시대였다. 2차 대전 직전인 1938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왕실 인장을 수여받기도 했지만 1년 뒤에 곧바로 2차 대전이 발발한다. 왕실 매장으로서 해롯은 2차 대전 중에 군복과 낙하산 등 군수품을 제공했는데 1차 대전 중 아버지 버버지와 마찬가지로 명예로운 후방 지원을 성실하게 해냈으며, 전쟁 이후에도 잘 버텨냈다.
3. M&A의 시대
평범한 사람들이 전설을 만들어낸 장황한 이야기를 이제는 끝낼 시점에 다다랐다. 1849년 창업 이후 110년, 두 가문의 5대에 걸친 이야기는 1959년에 사실 상 끝난다.
하지만, 해롯은 2020년 현재에도 여전히 건재하다. COVID-19 팬데믹으로 인해 매장 휴업이 지속되고 있지만, 해롯은 다시 불을 밝히고 하루 10만명, 최대 30만명의 고객을 맞이할 것이다. 과거 영국 상류층과 동의어였던 시기를 지나, 지금은 영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성지로 명성은 훨씬 확장되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아주 오랫 동안 해롯은 전통을 유지하며 런던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건물에 새겨넣은 모토 "Omnia Omnibus Ubique"는 시대를 건너뛰어 계승될 것이며, "Harrods for Everything"의 이념또한 반복될 것이다. 그것은 해롯의 운명과 같다.
* 그 이후
1959년 3대 버비지의 은퇴와 더불어 해롯은 스코틀랜드계 백화점 그룹인 프레이져(House of Fraser)社로 편입된다. 당시 런던 심장부의 유서깊은 백화점이자 영국 상류층과 동의어인 해롯이 스코틀랜드계 회사에 피인수되자 한동안 소란스러웠으나 이미 지역 백화점 15개를 보유하고 있던 프레이져 그룹은 해롯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논란을 잠재웠다. 프레이져는 이후 해롯을 기반으로 더욱 크게 성장했다. M&A를 통해 몸집을 불리고 금융지주회사 Scottish Universal Investments (SUITS)를 설립하기도 했다. 2차 대전 이후 경제가 회복되는 과정에서 해롯도 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오일쇼크와 냉전으로 인한 글로벌 경제 경색 국면에서 백화점이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당시 미국 소매업에 대형할인점이 맹위를 떨친 것처럼 영국과 유럽에서도 가격할인을 내세운 할인점과 외곽 쇼핑몰로 인해 백화점 업계에는 불황이 찾아온다. 설상가상으로 프레이져의 설립자인 휴 프레이져가 도박 빚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는 참담한 사태가 불거진다. 해롯은 창업 이후 처음으로 쇠퇴기를 맞이한다.
프레이져 그룹을 놓고 광산 대기업 Lonrho社의 롤랜드(Tiny Rowland)와 이집트계 사업가 파예드(Mohamed Al Fayed) 사이에 지분 관련한 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Fayed가 1985년 6억 5천 5백만 파운드를 들여 House of Fraser를 인수한다. 이 분쟁은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997년 파예드의 아들 도디와 다이애나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왕실과 해롯의 오랜 유대 관계는 파국을 맞았다. 왕실 인장이 회수되었고, 파예드는 수 십년간 영국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영국 시민권 발급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파예드는 2010년 카타르 홀딩스(Qatar Holdings)에 해롯을 매각했다. 매각 대금은 16억 파운드였다. 2013년에는 해롯백화점 그룹에 속한 축구클럽 풀햄도 매각했다.
(카타르 투자청 (QIA)은 해롯을 제외하고도 런던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있다. 카타르는 Songbird Estates PLC의 지분 대부분을 보유하여 Canary Wharf 금융 지구를 소유하고 있으며, Barclays를 소유하고 있는가 하면 Sainsburys의 대주주(22 %)이기도 하다. 또한 증권 거래소와 Camden 시장의 20 %를 소유하고 있다. 영국에서 그 영향력은 계속 커지고 있다.)
▶ 첫 걸음
1824 : 25세의 Charles Henry Harrod(1799~1885)이 린넨, 면, 잡화를 취급하는 도매상 창업
(Harrod and Wicking, Linen Drapers, Retail)
1834 : 차(茶)로 업종 전환 'Harrod & Co. Grocers'
(최초 창업 200년 후인 2020년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차를 포함하여 165종의 차를 보유)
▶ 공식적인 매장 개업, 백화점으로의 성장
1849 : 세계박람회 개최 장소인 Hyde Park 인근, Knightsbridge에 있는 소규모 식료품점 임대
1853 : 임대했던 상점을 인수하고 이웃 상점도 인수하여 확장
1861 : 아들 Charles Digby Harrod(21세)에게 매각 (가구, 향수, 도자기 및 유리제품으로 확장)
1874 : 인접한 건물 2채를 추가 매입하여 매장 확장
1880 : 백화점으로 공식 선언
1883 : 12월 화재로 소실; 오히려 더 큰 규모의 5층 건물로 재건 / 신용판매 개시
(고객과의 크리스마스 배달 약속을 모두 지키며 신용을 얻었으며, 보험을 기반으로 재건)
1889 : Harrod 's Stores Limited로 기업 공개 (해롯 가문의 지분 매각)
▶ 해롯 가문의 은퇴와 버비지의 등장
1891 : Richard Burbidge를 전문경영인으로 고용, 런던의 랜드 마크로 전환하는 프로젝트 개시
1894 : 영국 크리스마스의 전통이 된 해로즈 윈터 클리어런스 세일 (12.26~익년 1월 말) 1회 개최
1898 : 최초의 에스컬레이터 설치
1902 : 아티스트 William Neatby : Food Halls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Doulton 타일 장식 디자인 설치
(현재 문화재 등록되어 변경 불가)
1906 : 훗날 Teddy라 불리는 봉제 곰 인형 판매 개시
1914 : 소매업 체인 Dickins & Jones 인수
1916 : 부에노스 아이레스 진출, 최초의 해외 진출
1917 : Richard Burbidge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Woodman Burbidge가 전무 이사를 계승
1917 : 백화점 최초의 비행기 판매 / 극작가 Noel Coward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악어 구매
1921 : 해로즈 베어 - Winnie-the-Pooh / AA Milne의 이야기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곰이 됨
(1921년 Harrods에서 구입한 테디 베어를 가지고 노는 아들 Christopher Robin으로부터 Story 化)
1938 :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왕실 인장 수여 (왕실에 중국 유리 및 팬시 상품 공급)
1955 : Duke of Edinburgh (에딘버러 공작)의 인장 수여
▶ 두 가문의 완전한 은퇴와 M&A의 시대
1959 : 스코틀랜드계 House of Fraser의 Harrods 인수
1985 : Fayed(파예드) 형제의 House of Fraser 인수
1988 : 백화점 리뉴얼 공사에 4억 파운드 투입
1989 : 방문자 드레스 코드 가이드라인 제정 (찢어진 청바지와 배낭 금지)
- 신체의 은밀한 부분을 드러내거나 불쾌감을주는 그림이나 글을 묘사하는 옷을 입지 마십시오.
- 매장에서 헬멧을 착용하지 마십시오.
- 등이나 어깨보다는 손이나 앞쪽에 작은 배낭을 휴대하십시오
1994 : Fayed 형제 House of Fraser를 상장 회사로 분사하여 매각 후 Harrods 만 유지
1997 : 도디 파예드와 다이애나 비가 교통사고로 사망, 야간 조명이 처음으로 꺼짐 (1만 2천개 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