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을 넘어 체험의 미술로 나아간 로스코의 발자취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화가인 마크 로스코(1903~1970)의 명작이 테이트 모던에 전시되어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로스코의 모든 작품이 명작으로 생각된다. 그의 그림은 인상파가 색채를 깨부수고 빛에 천착했듯이, 입체파가 평면을 깨부수고 입체를 평면의 캔버스에 소환했듯이, 로스코의 그림은 형태를 해체하고 오직 색만으로 회화를 재정의하였다.
그토록 색채에 몰입했던 화가가 있었을까?
10년 전쯤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한 로스코 특별전에 다녀온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사실 예술의 전달 한가람미술관은 미술관 자체로써는 볼품이 없다. 그저 예술의 전당이라는 입지 덕분에 많은 전시가 성황에 이뤄지고 있지만, 로스코의 그림처럼 색채만 가지고 그 사이즈로 승부를 거는 그림에는 미술관으로써의 역할이 약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로스코의 그림을 강렬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같은 르네상스 미술의 강렬함과 달리 심장과 폐부를 깊이 찌르는 강렬함이 로스코의 작품에는 담겨 있다.
그 어떤 형태를 갖추지 않은 채 색채만으로 감정을 담아낼 수 있고 그 감정의 공명을 일으킬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운 체험이었다.
오늘은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 회화 그 자체보다는 그의 작품이 어떻게 체험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는 곧 방향을 잃는다.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어째서인지 시선은 휘청인다.
붉은색과 검은색, 자줏빛이 겹겹이 쌓인 화면은
형상도, 구도도, 이야기의 단서도 없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보는 법을 잊는다.
미술의 역사는 늘 ‘어디를 보게 만들 것인가’의 역사였다.
르네상스의 원근법은 시선을 한 점으로 수렴시켰고,
인상주의는 빛의 반사에 눈을 맞추게 했다.
모든 그림에는 ‘시선의 질서’가 있었다.
그 질서는 세계를 이해하게 해 주었고, 동시에
관람자를 언제나 바깥의 구경꾼으로 묶어두었다.
하지만 로스코는 그 질서를 없애버렸다.
그의 화면에는 중심도, 경계도 없다.
시선은 더 이상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하고,
서서히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그때 비로소 그림은 창이 아니라 거울이 된다.
빛을 투사하던 눈이, 감정을 비추는 눈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래서 로스코의 그림은 ‘보는’ 예술이 아니다.
그는 관람자에게 관조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이제 네 안을 보라. 그 안에서 색이 어떻게 울리는지 들어보라.”
시선을 잃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잃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지배를 내려놓는 일이다.
우리는 그림을 ‘이해하려는’ 대신, 그 앞에 머문다.
머무는 동안 감정은 미묘하게 움직이고,
색은 더 이상 물감이 아니라, 감정의 파장이 된다.
그 침묵 속에서, 관람자는 하나의 사실을 깨닫는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세상을 인식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일이라는 것을.
로스코의 그림은 우리를 눈먼 자로 만든다.
하지만 그 눈멂은 새로운 시야다.
그의 어둡고 깊은 색면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보는 대신,
존재를 느끼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감상자의 시선을 잃은 자리에서, 감정이 깨어난다.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이건 무슨 색이지?”가 아니라 “이건 어떤 기분이지?”라고.
로스코의 색은 물리적 속성이 아니라, 심리의 진동수에 가깝다.
빛과 색은 이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공명하는 파장이 된다.
로스코는 색을 ‘조합’ 하지 않았다.
그는 색을 호흡처럼 쌓았다.
얇게 덧입힌 반투명한 층들은
공기 속에 떠 있는 감정의 입자들처럼
서로 스며들고, 녹고, 흔들린다.
그 위에 또 하나의 색이 덧입혀질 때,
그건 새로운 색이 아니라, 감정의 온도 변화다.
따뜻함이 차가움으로, 생명이 어둠으로,
그리고 결국, 생의 끝을 닮은 정적(靜寂)으로.
그의 색면 앞에서 사람들은 말없이 선다.
그 침묵은 무거운 명상이라기보다
감정의 무게를 견디는 시간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있던 감정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혹은 설명할 수 없는 허무이든 —
그 감정은 로스코가 준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안에서 깨운 것이다.
로스코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색을 통해 인간의 비극, 황홀, 운명을 이야기한다.”
그의 색은 추상화된 언어가 아니라,
근원적인 감정의 언어(primitive language)다.
이 언어는 이성의 번역을 거치지 않는다.
눈으로 읽히지 않고, 가슴으로 흡수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그건 하나의 정서적 사건이다.
관람자는 그 앞에서 사유하지 않고, 감응한다.
색은 더 이상 시각적 정보가 아니라,
존재의 온도와 진동수가 된다.
그림은 더 이상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느끼게 하는가”로 이동한다.
감정의 발견은 단순한 감상의 변화가 아니다.
그건 예술의 중심이
‘작가의 의도’에서 ‘관람자의 경험’으로 옮겨간 순간이다.
로스코의 색면 앞에서 예술은 더 이상 객체가 아니라,
감정이 발생하는 장소가 된다.
로스코의 작품은 실제 대면해야 그 진가를 만끽할 수 있다.
인터넷으로 그의 도상을 살펴보았을 때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
실제 그림을 접하면 살아가게 된다.
그의 그림은 색만으로 채워져 있기에,
감상하는 자의 느낌과 감정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감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색과 함께 흔들리고, 녹고, 사라지며
자신의 내면을 ‘본다’.
그렇게 로스코의 색은
감정을 묘사하지 않고, 감정을 발생시킨다.
그의 붉음은 피가 아니라 열기이며,
그의 어둠은 죽음이 아니라 깊이다.
그 깊이 속에서 관람자는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자신을 통해 흐르는 순간을 체험한다.
그것이 바로 로스코가 말한 “비극의 황홀”이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서, 감정이 태어난다.
그는 우리에게 세계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느끼는 세계를 깨우게 한다.
로스코의 그림은 결국 공간이 된다.
그의 색면이 벽에 걸린 하나의 물체가 아니라,
관람자를 감싸는 감정의 장(field)으로 확장될 때,
그림은 비로소 ‘체험의 예술’로 완성된다.
테이트모던의 로스코룸에 들어서게 되면,
조명은 낮고, 공기는 묘하게 눅눅하다.
붉은빛과 자줏빛이 사방에서 천천히 밀려온다.
그 안에서 관람자는 ‘그림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 속에 있는 사람’이 된다.
빛은 더 이상 바깥에서 비추지 않고,
안쪽에서 번져 나온다.
그 빛의 진동에 따라, 감정도 파동처럼 흔들린다.
로스코가 만든 건 캔버스가 아니라, 감정이 울리는 공간이었다.
그의 예술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개인적 감정’을 ‘공유 가능한 체험’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로스코의 색은 누구에게나 다르게 보이지만,
그 감정의 깊이에서는 묘한 공통점이 생긴다.
누군가는 고요를 느끼고,
누군가는 슬픔을 느끼지만,
그 차이조차도 서로의 감정이 진동하는 리듬으로 엮인다.
그 공간은 말이 사라지고, 감정이 서로 공명하는 장소다.
이것이 로스코가 꿈꾼 예술의 최종 형태였다.
그림은 하나의 언어 없는 대화가 된다.
관람자는 작가의 세계에 들어가는 대신,
자신의 감정을 타인의 감정과 겹쳐본다.
그때 예술은 더 이상 혼자의 체험이 아니라,
공감의 사건이 된다.
로스코의 색면 앞에 앉아 있으면
시간이 느려지고, 경계가 흐려진다.
그 침묵의 공간에서 우리는 각자의 감정을 꺼내 들고,
서로 닮아 있음을, 서로 다름을 느낀다.
그건 종교도,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그건 단지 — 존재들이 함께 진동하는 순간이다.
그가 만든 것은 그림이 아니라 공감의 장소,
색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진동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더 이상 관람자가 아니다.
빛과 감정과 존재가 하나로 엮이는
순간의 중심, 그 진동 그 자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