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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탕 Sep 01. 2022

예스걸이 되어보았다

체험 삶의 현장

영국에 오고 나서는 별로 내키지 않더라도 웬만한 부탁이나 기회가 있으면 무조건 예스를 하고 보는 버릇이 생겼다.

집에서 일을 하다 보니 경험과 만남이 제한되어 있는 것 같아 소극적으로 살지 않기 위해서 만들었던 나만의 룰이었던 것이 지금은 버릇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예기치 못한 해프닝과 상상도 못 했던 경험을 하기도 하는데,


지난주는 특히 특별한 에피소드들이 많았다.


1. 이상한 번역가


모처럼 일이 많이 없어 한가롭게 보내던 월요일, 갑자기 동료로부터 급한 일이 있다며 연락이 왔다.

설문지 11개를 번역을  달라는 것이었다.

원래도 설문지 번역은 많이 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본어-> 한국어, 혹은 영어-> 한국어였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했었다. 한국어로 번역, 외국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어느 한쪽이 모국어 이기 때문에 수월하다.

근데 이번에는 일본어를 영어로 번역해 달라는 부탁.

사실 일본어도, 영어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머릿속에서 한국어를 거쳐서 다른 한쪽을 번역하게 되는  이러한 비효율적인 프로세스를 거친다.

일본어->(한국어)->영어


일본어/영어를 쓸 때 뇌세포가 모국어를 사용할 때의 1.5배 정도 쓰인다고 치면

둘을 번역할  거의 4 정도   같았다.

내가 과연 번역을 잘했을까 하는 불안에 계속 체크하며 번역을 하다 보니 시간도 두배 이상 걸렸고,

원래는 한가 할 것이라 생각했던 일주일의 시작이 일을 마치고 나니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부디 문제없이 잘 번역했길....


2. 어딘가 부족한 통역가


번역을 다 해내고 난 바로 다음 날, 또 이상한 의뢰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회사의 전무쯤 되시는 높으신 ... 당연히 평소에 말할 기회도 없는 분인데, 갑자기 연락이 개인 챗으로 와서 당황했다.

오랜 거래처인 한국 회사와 트러블이 있었고, 본인과 영어로 소통을 하고 있지만 영어가 전무님의 모국어가 아닌 지라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일본어를 한국어로 통역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의뢰였다.

때마침 사내에 유일한 한국인이 나였고, 그렇게 한국시간에 맞춰 아침 이른 시간에 통역을 하게 되었다.

대학교 때 아르바이트로 통역을 한 이후 처음으로 하는 통역이었다.

살짝 긴장했지만 준비할 겨를도 없이 생겨버린 일이라 얼떨떨한 마음으로 화상회의에 참여했다.

원래는 회사 전무님 말만 통역하는  업무 범위였는데 갑자기 한국  사장님도 본인도 한국어로 하겠다 하셔서 양측의 말을 계속 통역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정신없이 한 시간 반이 흘렀고, 웃으며 마무리 지으며 끝이 났다.

결과적으로 통역 자체는 재미있었다.

내용 자체는 참 민감한 사항이었으나, 두 분 다 회사의 간부답게 비즈니스 적인 부분은 냉철하게, 하지만 사적인 감정은 일체 담지 않고 담백하게 대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통역으로 이런 자리에 참여할 수 있어 좋은 경험이 되었다.

추가적으로 통역이란 참 힘들지만 재미있는 직업이라는 점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3. 어색한 TV 출연진


친구가 출연하고 있는 TV 프로그램에 갑작스레 보조 출연을 하게 되었다.

무려 이틀을 걸려 촬영하는 스케줄로 처음에는 뭐 그렇게 힘들겠어하며, 별로 큰 생각을 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또 한 번 예스를 외쳤는데, 첫날의 집합 시간이 새벽 5시였다.

계산을 해보니 아무리 늦게 일어나도 새벽 3시 반에는 일어나야 맞춰서 갈 수 있는 거리.

너무 일찍 일어나야 해서 긴장을 계속하고 잠을 청해서 그런지 거의 잠도 못 자고 퀭한 눈으로 촬영지로 향했다.

새벽 5시부터 시작한 촬영이 오후 5-6시까지 길어지자, 긴장했던 마음은 어디 가고 그냥 누워서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면서 첫날이 끝이 났고,

다행히도 둘째 날은 시작이 늦어서 첫째  만큼 힘이 들지는 않았지만 피로가 온몸에 쌓여서 천근만근이 되어 겨우겨우 촬영을 마쳤다.

본업이 있는데 이렇게 힘든 일을 매달 하다니...

하는 생각이 들며 친구가 존경스러워지기까지 했던 힘든 촬영이었고, 방송인이라는 직업이 유명세뿐만 아니라 견뎌야 하는 것들이 훨씬  많다는  직간접적으로 체험을 하게 되어,

누가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나는 방송인 체질은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ㅋㅋㅋ


끝으로 내가 생각한 예스 걸의 단점과 장점은 이렇다.


 단점:

갑자기 들어오는 일들에 떠밀려 엄청나게 피로한 날들을 보낼 확률이 높아진다

가끔은 내 수용 한계치를 넘은 일들이 들어올 때가 있다


장점:

미션을 수행하는 느낌이 들어 일상의 스릴을 가미한다

해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작아진다

예기 치도 못한 부분에서 자신이 잘하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2년 정도를 이렇게 살아보니 아직까지는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은 것 같다.

특히 도전할 엄두도 못 내었던 부분을 도전하며 해내었을 때의 카타르시스는 마약과도 같다.

이렇게 일상 속의 자그마한 것들에 승리감을 맛보며 예스 걸 도전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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