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베이스볼
그러고 보니 막내 아들이 야구를 시작한 계기가 나와 비슷합니다.
유두열 감독(前청주고)은 아들 유재신(現넥센히어로즈)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어릴 적 큰 아들이 리틀 야구단에서 활동하였는데 막내 재신이가 그걸 보고 자기도 야구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켜본 것이 어느덧 프로 선수로 성장하였다.
유두열의 형 역시 국민학교 야구부 선수였다. 하지만 늘 후보에 머무는 형의 모습이 어린 유두열의 눈에는 답답하기만 하였다. 본인도 야구를 시켜 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다고 한다.
[사진1 / 2016프로야구 개막전 시구자로 나선 유두열 님 (사진=중계화면 캡처)]
저랄 바에 내가 하지. 행아맨키로 후보는 안 할끼다!
(저럴 바에 내가 하지. 형처럼 후보 선수는 안 할거야!)
이런 계기로 유두열은 마산 월포국민학교(現월포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하였다. 꼬맹이의 승부욕이 보통이 아니었다. 만년 후보였던 형은 국민학교 졸업과 동시에 야구를 그만두었다. 유두열은 멈추지 않고 마산동중을 거쳐 마산상고(現용마고) 야구부로 진학하였다.
누군가는 1984년 롯데의 첫 우승을 떠올리며 유두열은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한국시리즈 7차전 당일, 선발 엔트리를 작성하던 매니저의 실수로 유두열의 타순이 6번에서 5번으로 바뀌고 말았다. 오더를 확인한 강병철 감독은 곧 실수를 알아차렸으나 어쩐 일인지 그대로 두었다.
이것이 바로 반전의 기회가 되었다. 바뀐 타순으로 유두열은 8회 초 주자 1, 3루 상황에서 타석에 나섰다. 그리고 3점 홈런을 날린다. 순간의 한 방으로 롯데는 역전에 성공하였다. 우승을 이루었고 유두열은 한국시리즈 MVP가 되었다.
사실 7차전을 앞두고 유두열의 한국시리즈 성적은 부진하였다. 17타수 1안타에 그친 것. '공포의 1할 타자'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과거를 되짚어 보면 상대를 위협하는 '공포의 중심 타자'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타석에 유두열이 있었다.
[사진2 / 1984시즌 한국시리즈 MVP로 뽑혀 카퍼레이드 중인 유두열 (사진=포털)]
재창단한지 10년 째를 맞이한 마산상고 야구부. 고교 2년생인 유두열은 포수이자 중심 타자로 팀을 이끌었다. 그의 이름이 빛난 건 1974년에 열린 제4회 봉황대기고교야구다. 춘계서울시고교연맹전에서 전승 우승을 하고 온 서울중앙고를 상대로 마산상고는 스코어 8-0으로 콜드게임 승리를 거두었다. 이 날 유두열은 3점 홈런을 치며 팀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대회 때마다 번번히 4강 문턱을 넘지 못 하는 마산상고 야구부였다. 고교 팀 성적이 좋지 못 하자 유두열은 대학 진학에 실패하였다. 대신 실업팀인 한국전력에 입단하였는데, 이 무렵에 한 가지 굳은 결심을 하였다. 반드시 국가대표가 되겠다고.
성인이 되고 그의 진가는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1977년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 4차전에서의 일이다. 9회 말에 유두열의 홈런이 터졌다. 왼쪽 담장으로 넘어간 2점짜리 홈런으로 한국전력 팀은 상대 추격에 나설 수 있었다. 이후 팀에서 타순 3번과 4번을 오가며 탄탄한 허리 역할을 맡아왔다. 1979년엔 김인식, 장효조 등을 제치고 리그 전반기(1~3차) 통산 타율 1위에 이름을 올렸다.
1979년은 스무 살 유두열의 꿈이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실력을 인정받아 그 해부터 매년 태극마크를 달고 국가대표로 뛴 것이다. 주목할만한 경기는 1982년에 잠실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이다. 많은 야구팬들이 잘 알고 있는 '약속의 8회'가 나온 그 대회이기도 하다.
대회 7일 째, 캐나다를 상대로 8회에 유두열의 솔로 홈런으로 한국은 우승을 향한 힘을 끌어 올렸다. 이후 한국은 도미니카를 상대로 1승을 더 추가하면서 일본과 함께 6승1패로 공동 1위에 올랐다. 결승까지 한국은 호주, 일본은 파나마와의 경기가 남았다. 4개 국의 전력으로 볼 때 대다수가 한국과 일본이 우승컵을 두고 맞붙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허나 쉽게 이길거라 여긴 호주와의 경기에서 한국은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경기 초반에 유두열과 이해창의 홈런으로 선취 3점을 얻어 수월한 듯 하였다. 하지만 5회에 투수 최동원의 난조로 단숨에 5실점하고 말았다. 9회에 가까스로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하였으나 연장으로 이어진 10회, 11회에서 승부를 보지 못 하였다. 12회에 다시 유두열의 안타를 시작으로 1사 만루라는 황금 찬스를 만들었지만 타석의 스퀴즈번트가 병살 처리되면서 득점에 실패하고 만다.
결국 서스펜디드 경기가 선언되었다. 경기는 다음 날 오전10시에 재개되었다. 여기서 이겨야만 저녁에 숙적인 일본과 결승전을 치를 수가 있다. 이틀 째 이어지는 지지부진한 경기를 잘 끝내고 속히 결승을 위한 컨디션 정비가 필요하였다. 선수들은 절대로 여기서 대회를 끝낼 수가 없었다.
경기는 여전히 동점 상황이고 15회 말로 접어들었다. 한국의 공격 차례, 1사 만루의 상황에서 타석에 유두열이 나왔다. 상대 투수는 호주의 세 번째 투수였다. 볼카운트를 1스트라이크 2볼로 끌고 갔다. 타자에게 유리한 가운데 네 번째 공에 유두열이 배트를 휘둘렀다.
배트에 따악- 하고 잘 맞은 야구공이 외야 저 멀리를 향해 쭈욱 날아갔다. 낙구 위치를 쫒아간 호주의 좌익수가 몸을 틀어 가까스로 볼을 잡아내었다. 그 순간, 3루에 있던 조성욱이 재빠르게 뛰어 들어가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스코어 5-6, 한국의 결승 진출이 결정되었다. 이후 한국은 결승에서 일본을 만나 대회 개최 44년만에 아시아 국가로선 최초로 우승을 이루었다. 유두열의 희생플라이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추억하는 '약속의 8회'는 결코 보지 못 하였을 것이다.
[사진3 / 2016프로야구 개막전 시구 중인 유두열 님 (사진=중계화면 캡처)]
* 몇 년 전, NC의 밑거름인 마산 야구에 관하여 취재하면서 고인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접하였습니다. 자료를 보면서 느낀 것은 고인은 마치 혜성같이 나타난 선수였습니다. 기량이 꾸준히 월등하진 않았지만 팀이 위태로운 순간에는 속 시원한 결정타 한 방을 보여주는 선수였습니다. 지금의 40대 야구팬들이 어린 시절의 영웅으로 고인을 기억하는 이유도 이러한 까닭이라 생각합니다. 2016시즌 개막전에 사직구장에 시구자로 등장하여 병세가 완쾌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비보에 더욱 마음이 저려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