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미니멀리스트가 되기 전에는 길고 깊은 삶의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인생은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은지 오래였다. 나는 창창한 스무 살은커녕, 철없는 유년시절마저 마음 놓고 즐기지 못하며 살았다.
불행 대결 같은 걸 해서 승리라도 거머쥐고 싶은 건 아니지만, 지나온 삶은 꽤나 불행에 가까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인생에서는 살아남았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여러 번 고민을 해야만 했으니.
가정의 불화와 가난, 타의로 꺾인 꿈, 부모처럼 의지하던 가족의 죽음, 학교 폭력, 불의의 사고, 실패와 같은 인생의 쓰디쓴 경험들(사실 대부분 하나의 문제에서 파생된 일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이 인생의 교훈이 됐다고 허울 좋은 포장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 이건 전부 불필요한 불행이며 인생을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아픔을 딛고 나아가는 동시에 간절히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인생이란 무의미한 것이며, 살아갈 가치 따윈 없다고 여겼고, 이 모든 고통을 겪을 바에야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느꼈다. 너무 괴로울 땐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끝을 맺어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다.
사실 어쩌면, 물건을 정리한다는 건 마지막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떠날 것을 알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정돈된 상태로 끝을 맞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상황에 묶이고 치이는 내 삶이 죽도록 싫었다. 그래서 불행과 관련된 모든 걸 끊어내고 싶었다.
마음 깊이 새겨져 버린 가난 때문에 꾸역꾸역 모아 왔던 물건들을 치우기로 했다. 그러나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내가 싫어하는 물건들에 다시 둘러싸이기도, 끔찍한 환경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기도 했다. 계속해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민을 반복했다. 의지를 다잡고 모든 걸 끊어낸다는 건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만약 내 모든 물건이 불에 타버리거나 물에 쓸려간다면 차라리 마음 편히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정리든 뭐든 그만두고 싶었다. 뭘 하든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삶을 버티고 버티다 보니,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속는 셈 치고 한 번 더 기회를 잡아보기로 했다.
과거와 현재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나 자신의 굳은 의지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운 좋게 누군가가, 혹은 어떤 기회가 나를 도와주기를 기다리다가 평생을 그런 식으로 흘려보낼 수는 없다.
나는 다정함을 사랑한다. 그럼에도 세상의 모든 문제는 용서와 사랑만으로 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가까이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어설픈 관용을 베풀다간 모든 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관계에도 미니멀이 필요한 것이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한 직업을 가질 게 아니라면 언제든 일을 시작할 수도 그만둘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남들처럼 안정적이고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지 못할 거라는 걱정에서 자라나던 초조함과 불안함도 사라졌다. 내가 불안했던 이유는 모든 기준이 나 자신이 아닌 타인과 사회에 있었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것 자체가 나의 목표는 아니다. 잘 살기 위해 선택한 삶의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직업이든, 취미든, 사람이든 뭐든 간에 그 어떤 것도 내 삶의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때로 인간이 죽음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고서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할 겨를도 없이 살아가곤 한다. 그러나 주어진 기회를 저버리고 세상에 맞춰가며 버둥거리며 살기엔 너무나도 아쉽다. 삶은 생각보다 별 것 아니며, 인생은 유한하고, 언제 끝나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