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과부하 시대의 역설, 타자기
우리는 '효율'이라는 거대한 가치 아래 움직인다. 투자 대비 얼마나 고효율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가? 그래서 ‘가성비’라는 말의 소비가치가 나오게 되었고, 물건을 사던지, 일을 하거나 사람을 쓰는 곳에서도 소위 '가성비'를 중시하는 풍조마저 생겼다. 더 빠르고, 더 많이 해내야만 나의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 인공지능의 등장은 이런 효율성 경쟁에 기름을 부었다. AI는 챗봇으로 보고서를 쓰고, 이미지 생성기로 순식간에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림뿐인가? 이제는 고화질의 영상도 만들어 준다. 명령어 몇 마디에 논문과 같은 방대한 정보의 핵심내용을 정리하고 요약해 준다. 뿐만 아니라 복잡한 데이터 분석도 뚝딱 해낸다. 우리는 AI가 제공하는 무한한 편리함에 도취되어, 우리가 쏟아부어야 할 시간과 노력을 아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편리함의 이면에는 깊은 상실감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효율성에 부합하는 결과는 도출했으나, 정작 내 머릿속에 그 과정이 경험으로 남지는 않았다. 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고민과 수정 과정이 반복되는 가운데 나의 내적 성장도 있을 터, 그런 성장의 기회마저도 우리는 인공지능에게 다 양보해 버린 것은 아닌가? 또한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아낀 여유의 시간을 과연 나의 성장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반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AI가 우리를 대신해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처리해 줄 때, 우리는 오히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공허함에 빠진다. 글쓰기, 그림 그리기, 음악 만들기 같은 창작 활동은 더 이상 고뇌의 산물이 아니라, '생성'의 영역으로 넘어가 점점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인간이 가진 고유한 창의성은 점점 그 자리를 잃고 있다. 타인이 만든 정보를 가공하고 재조합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우리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오롯이 담아내는 경험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AI 시대에 우리는 편리함을 얻었지만, 정작 내 머릿속에 남겨할 것은 무엇이었나?
우리의 뇌는 이미 디지털 환경에 깊이 길들여져 있다. 깊이 있는 사유와 통찰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는 바로 '삭제 버튼'과 '복사-붙여 넣기' 기능이다. 디지털 문서 편집은 오타를 순식간에 지워주고, 단락을 통째로 옮길 수 있게 해 주며, 과거의 글을 쉽게 재활용하게 한다. 이런 편리함은 우리가 글쓰기 행위를 신중하게 여기는 습관을 앗아갔다. 생각을 다듬고, 고민하며 한 문장 한 문장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의 가치를 잊게 만든 것이다. 짧고 자극적인 숏폼(Short-form) 콘텐츠에 익숙해진 뇌는 인내심을 잃고, 한 가지 주제에 오랫동안 집중하지 못한다. 이제는 2~3분 분량의 노래 한 곡도 끝까지 듣지를 못해 스킵(skip) 버튼을 누르는 경우도 있을 정도이다. 스킵(skip)의 습관화로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데 지장을 초래하고 있지는 않는가? 정보는 홍수처럼 쏟아지지만, 단편적인 지식만 머릿속에 남을 뿐, 깊이 있는 사고로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뇌는 '복붙'에 최적화되어, 타인의 지식을 내 것인 양 쉽게 가져와 소비하는 데만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다.
필자의 사례이다. 필자는 내비게이션을 구매하는데 2~3년의 시간을 고민하고 미루다가 구매한 경험이 있다. 너무 오래전의 이야기지만 아마 1999년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비게이션이 없던 당시에는 자동차 보험을 갱신하면 보험사에 두꺼운 전국교통지도 책자를 선물로 주는 관행이 있었다. 덕분에 장거리 운행이나 초행길을 갈 때는 전국지도 책을 보며 운전했다. 지금 편리하게 티맵에서 음성안내를 들으면서 운전을 하지만, 그때는 가다가 길을 모르면 차를 세워 지나가는 현지인에게 묻거나, 지도책을 펼쳐서 길을 확인하고 다시 출발했다. 지금의 MZ세대 중에 M세대는 아버지가 그렇게 운전하시는 걸 뒤에서 본 기억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먼 옛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데, 차량용 내비게이션이 개발된 것이 1996년의 일이고, 본격적으로 휴대용 단말기로 대중화된 것은 2004년부터의 일이다. 필자는 가능한 내비게이션 구매를 최대한 미루었다. 이유는 내비게이션을 쓰면 내 머릿속의 지도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어 내 공간 지각력이 퇴화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2004년 당시 서울에서 운전할 때, 필자는 큰 불편함 없이 어디든 다닐 수 있었다.(가끔 초행길에 종이지도를 펼쳐보거나, 현지에서 사람들에게 직접 길을 물어 찾아가는 경우는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내비게이션에도 없는 지형, 지물, 교차로의 특징 같은 정보들이 경험으로 축적되어 있었다. 때문에 예상치 못한 길을 만나더라도 스스로 해결이 가능했다. 하지만 결국 몇 년을 버티다가 내비게이션을 구매했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지방에 모르는 초행길 갈 일이 많아지면서이다. 역시 내비게이션은 편리했다. 지금도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실시간 교통정보를 기반으로 길안내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가끔은 내비게이션을 믿지 않고 내가 아는 길을 우선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 내비게이션에 종속되는 것 같은 반감의 심리일 수도 있고, 퇴화되지 않기 위한 나만의 몸부림 일 수도 있다.
이처럼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창의성을 잠식하는 시대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아날로그적인 도구인 '타자기'를 다시 꺼내야 한다. 타자기는 디지털 기기가 가진 모든 편리함을 거부한다. 오타가 나면 화이트로 지우거나, 종이를 통째로 바꿔 다시 써야 한다. 복사-붙여 넣기는 꿈도 꿀 수 없고, 오로지 '한 글자씩' 써 내려가는 노동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바로 이 불편함이 타자기의 가장 큰 매력이다. 타자기는 '삭제 버튼'이 없기에, 우리에게 신중함을 강요한다. 신중하게 한 글자 한 글자에 집중하고, 생각을 정리하며 글을 써 내려가는 경험은 뇌를 활성화하고 창의적인 사고향상을 돕는다고 생각한다. 타자기를 두드릴 때 ‘철컥’하고 들리는 타건음 소리와 키캡을 통해 손끝에 미세하게 전해지는 진동과 압력은 온전히 '쓰는 행위'에만 몰입하는 윤활유가 된다. 그래서 필자에게 타자기는 단순히 글을 쓰는 기계가 아니다. 디지털 과부하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집중력과 인내력, 사유하는 힘, 그리고 창작의 본질을 되찾는 재생의 도구이다. AI가 주는 편리함이 우리를 멈춰 세울 때, 타자기는 손으로 직접 글을 쓰는 노동을 통해 '생각하는 인간'으로 다시 서게 한다. 결국 편리함에 종속되면 자신을 잃어간다고 느낄 때, 비로소 다시 불편함을 통해 나를 찾는 역설적인 상황이 지금 필자에게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다시 타자기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