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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온 돌보 Jul 04. 2024

엄마의 콩장

한여름 콩장물이 끓는다. 몇 시간을 끓였을까, 간장 끓는 냄새가 부풀더니 코끝을 간지럽힌다. 

엄마는 동네에서 콩장맛집으로 통했다. 밤콩 대신 선택한 서리태는 꽤나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윤기 나는 검은 태가 맛있게 무너지게 하려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했다. 고작 물, 간장, 물엿이면 될 것이었지만 그것들의 황금 비율과 뜨거운 열기로 푹 끓여내야만 하는 정성이 수반되었다. 마법의 비율이었을까, 엄마의 콩장은 언제나 맛있게 익었다. 적당히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콩껍질이 혀 안쪽에 말려들어갈 때 비로소 내비치는 짭조로 한 속살까지 알맞게 익었으니까. 손이 제법 컸던 엄마는 한번 콩장을 할 때면 동네사람이 다 나누어 먹을 정도의 규모로 하고는 했다. 그러면 옆집 앞집 여러 집 할 것 없이 나누어 먹을 만큼의 양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눠 먹는 모두의 콩장의 한 시즌이 끝나면은 저마다 앞다투어 시즌투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싫은 티 하나 없이 그 고된 과정을 도리어 반복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정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어제는 엄마의 검진일이었다. 2년마다 반복되는 건강보험 검진일 테지만 한 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툴툴거렸다. 형식적인 검사일뿐일 테니 그렇게 열심일 필요가 없다며. 그때마다 엄마는 망설였다. 괜한 시간 내어 먼 길 가는 것은 아닌지. 어느 날부터 심해진 기침도 우습게 여겼는데, 이까짓 거 안 해도 그만이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받았던 검진 그 형식적인 검진 때마다 뭔가가 나오고는 했다. 2016년이었으니까, 8년 전 엄마에게 그렇게 전신경화증이라는 희귀 난치병이 우리를 덮쳤다. 


8년은 정말로 어려운 시간이었다. 처음 산정특례를 받던 날 병원 벤치에 앉아 두 손을 덮어 주책맞은 눈물에 얼싸안았다. 한정된 시간이라는 그림자가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그 사이 심해진 간질성 폐질환은 숨통을 조여왔고 때마다 받던 검진은 그때마다 엄청난 좌절을 안겨주었다. 


폐이식을 진작에 했어야 했다는 엄마의 폐에는 어느새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그렇게 굳어간 폐를 부여잡고 한여름에는 조여진 숨을 몰아 쉬며, 한겨울 추위로 새파랗게 질려 아린 손가락 끝 호호 불어가며 버텨갔다. 그 와중에 엄마에게는 두 손주가 찾아왔다. 어쩌면 엄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자녀 계획. 그저 함께 보내고 싶었던 나의 염원이 하늘 끝 닿았던 것일까. 엄마와 내가 쌓은 새로운 추억 육아. 그렇게 함께 키우며 울고 웃었다.




2년마다의 검진 일정은 어제 했던 일만큼 성가셨다. 금세 순번은 돌아왔고, 언제나의 기다림은 지루했다. 너무나 익숙했던 검진 속에서 새로운 것은 없겠지 싶었던 안일한 생각은 어찌 됐는지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와는 다른 일정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출발한 검진의 연속이었다. 집과 병원을 오가는 일정이 고달팠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길이면 얼마나 신을 찾았는지 모르겠다. 제발 그녀는 아니길, 내게 시험의 순간이 오지 않기를 그토록 간절히 빌었던 적이 없던 것 같다. 


집에 돌아가는 길, 때마침 지난 기억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한동안 끓었던 글로리의 열풍에 물리적 폭행 없이 훑어간 짙은 고통이 생각났다. 화장실에서 수업을 거부하며 눈덩이 위아래가 붙어버릴 때까지 울었던 시간들, 그때마다 내게 찾아온 나의 구원, 나의 그녀. 때마침 생각났다. 이유 없는 괴롭힘과 질시를 견뎌가며 보냈던 학창 시절. 은근한 흘김 대신 장대 같은 우산을 들고 하굣길 지켜서 있던 그들을 빠르게 도망쳐야 했던 두려움의 시간들. 전학을 가서도 마주치지는 않을까 벌벌 떨어야 했던 기억. 그런 나를 때마다 지켜준 엄마의 온정이 떠올라 눈에 담긴 뜨거운 눈물 녀석이 울컥하고는 넘치는 것이었다.




오늘은 엄마가 암을 선고받은 날이다. 


엄마는 오늘도 내게 줄 콩장을 졸이고 있다.

오늘 나는 엄마의 비법이 잔뜩 쓰여있는 요리책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나는 떠나야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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