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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미 Oct 24. 2019

5년간 다닌 첫 직장을 퇴사한 이유

홍보대행사 5년차에 찾아온 퇴사 시그널

저 퇴사할게요


입가에서만 맴돌던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홍보대행사를 다니며 사람이 미칠듯이 싫었던 적도 있었고, 끝없이 주어지는 일을 꾸역꾸역 해나가며 아침에 교통사고라도 나서 입원하고 싶단 생각을 한 것도 부지기수.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견디는 것이 토나오게 버거웠던 순간도 많았다.


퇴사를 말했던 시점은 모든 '최악'이 한 차례 지나간 뒤였다. 당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싫었던 것도 아니었고, 일이 많은 건 늘 그러했으니 특별할 건 없었고. 연봉 상승과 커리어 성장을 위한 선택이었다면 퇴사가 아닌 이직을 해야 했으며, 혹 이게 퇴사의 이유였다해도 연봉협상 이후 퇴사하는 것이 '실리적으로는' 맞았다.(퇴사를 말한 시점은 그 해 연봉협상을 한 달 앞둔 때였다) 당시 4년 9개월의 경력도 애매했다. 5년을 채우고 퇴사해야 당당하게 5년 이상 경력직으로 지원할 수 있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나의 퇴사 결심은 생뚱맞았다.



우리 살아가는게 힘이 들 때가 있어~


야경이 왜 슬프지?


신화의 겨울 앨범 수록곡 '기도'의 후렴구. 퇴사 결심 몇 달 전부터 눈물이 급격히 많아지더니, 이 노래만 들으면 눈물이 자동 반사적으로 나왔다. 야근 후 집에가는 택시에서 창밖만 봐도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공허했고, 의욕이 없었고, 울고 싶었던 시기.(나 우울증이었니?) 눈물이 나올락말락 하는데 누가 토닥여 주면 그때부터 대성통곡을 하게 되는. 이 노래는 나를 토닥여서 기어코 눈물을 쏟게 만드는 그런 노래였다.



화 내는 시간이 아까워요


모처럼 회사 1층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갑자기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1시간 내로 긴급 보도자료를 작성해 달라는 내용. "아~ 보도자료 써야 되네? 내가 쓸게요" 후배들에게 세상 평온하게 얘기하니, "이 상황에서 화를 안 내고 침착하게 얘기해서 더 슬프다"는 답이 돌아왔다. "화를 내든 안 내든 결국 그 일은 우리가 해야 는데.. 화 내는 시간이 아까워요" 나의 대답이었다. 화가 안 났다. 그냥 체념의 상태. 누군가를 탓하며 화를 내다가도, 이게 그 사람 탓인가? 그 사람의 상급자 탓인가? 우리 사장님 탓인가? 끝없이 의문을 제기했고, 마지막은 늘 '내 탓'으로 결론이 지어졌다. 내가 못난게 문젠데 화를 내서 무엇하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를 탓하고 있었다.  



배고파...


영화 <리틀포레스트>의 한 장면 (출처 : 네이버)


배고프단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팠다. 뱃속의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았다. 기자미팅에서 고급스러운 음식을 아무리 먹어도(당시는 김영란법이 없었다) 그건 그저 불편한 식사였을 뿐. 집에서 먹는 따뜻한 흰 쌀밥+계란후라이를 먹어야 좀 먹은 것 같았다. 집밥에 어지간히도 집착을 했다. 퇴사한지 2년이 지 후 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주인공이 "배고파서" 고향에 내려왔다고 말했을 때, 심장이 쓰라렸다. 그 배고픔에 뼈저리게 공감해서. 배고프다는 대사가 참 슬프고 아리고 아프게 다가왔다. 



기억이 안 나


일을 잘 하고 싶었다. 그래서 늘 일 생각을 했다. 퇴사 즈음엔 머릿속에 아웃룩을 통째로 넣은듯이 일과 관련된 건 '병적으로' 과하게 기억하게 될 정도였다. 반면 '일'이 아닌 일은 기억할 수 없게 됐다. 당시 나는 친구들과 나눴던 대화를 금세 잊었다. "기억이 안 나"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한 시기. 내가 한 말을 기억 못하고, 들었던 말도 난생 처음 듣는 말인양 반응했다.(원래 이런 경향이 좀 있지만 이땐 유독 심했다;) 친구들은 나의 증세를 '알음아름병'이라고 불렀다. '알츠하이머'의 '알'과 내 이름의 '아름'을 딴 병명이다. 난 그저 일을 잘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입사 후 야금야금 일상을 파고든 '일'이 어느새 '나'보다 더 커져버렸다.  




첫 직장을 퇴사한지도 벌써 4년이 다 되어간다. 자기 퇴사라는 선택하게된 이유를 아직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다만 당시 나의 온 몸과 정신의 감각이 여러 시그널을 보내왔고, 다행히도 그때의 내가 그 시그널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건 안다. 여러 시그널을 통해 내 삶을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앞뒤 생각하지 않고 내린 결정이 바로 '퇴사'고, 이게 바로 5년 간 다닌 첫 직장을 퇴사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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