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우리 집 앞 편의점에는 참 다정한 사람이 산다. 밝은 미소와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 진열대를 보다가 헤매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를 잘 알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으며 같이 찾아봐 준다.
그의 인사와 말과 행동은 내가 편의점에 있는 내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주변의 푹신한 소파 같다. 조금의 쉼이 필요하거나 잠시 앉았다 가기 위해 그쪽으로 몸을 옮기면 생각했던 것보다 편하고 따스히 나를 감싸준다.
그 사람을 본 지도 벌써 3년은 된 것 같다. 편의점에서 일하다 보면 여러 손님을 응대해야 하고, 밤낮이 바뀌는 순번에 따라 피곤을 이겨내야 하고, 재고 파악부터 진열까지 신경 쓸 게 많을 텐데, 한결같음을 넘어 볼 때마다 친절함이 느는 느낌을 받는다.
그에게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어떨 때는 새로 온 점원의 곁에서 OJT를 하는 모습을 볼 때도 있다. 상황이 바뀌고 챙길 동료가 늘어날 때마다 그의 에너지는 더 밝고 크게 편의점을 채우는 것 같다.
그가 이렇게 남에게 친절과 감동을 주는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도 나처럼 직장에서 일을 하고 월급을 받는 처지기에 학습되고 훈련된 서비스 마인드가 잘 발현된 건 아닐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3년째 똑같은 그의 모습을 보며 다정함이란 것이 지속 가능하게 상대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랍다.
직장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갖가지 일에 떼가 타기 시작했고, 영혼이 깎이는 숙명을 받아들이면서 상황과 관계와 힘의 우위에 맞춰 말과 마음을 조정하는 능력이 생겼다. 그럴수록 보이는 것에는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것 너머에 숨어 있는 진정한 무언가를 찾기 바빴다.
나에 대한 친절함은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거나 떠맡기 싫어하는 일을 대신할 때 늘어났고, 책임을 나눠야 하거나 성과를 구분해야 할 때면 느닷없이 매섭게 돌변했다. 한 때의 열정도 실리의 득실 앞에 맥을 못 추리고, 온정과 나눔도 냉정한 잣대 앞에 별다른 미덕이 되지 못할 때마다, 뜨뜻미지근한 나로 사는 길을 택했다. 모두를 위한 유일한 선은 경계를 넘지 않는 적당함과 호의를 가장한 이기심이었다.
회식이 있었던 날, 밤늦게 편의점에 들렀다. 소화가 잘 되는 카페라테를 사기 위해서다. 술을 많이 마신 날에는 반드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동네를 크게 한 바퀴 걷고 들어간다. 현관문에 들어설 때부터 몸이 비틀거리거나 혀가 베베 꼬인 채로 가족들을 보는 걸 싫어한다. 내가 몸 바쳐 마신 술과 그 힘으로 남들을 받쳐 줄 때 끌어올린 텐션을 길바닥 곳곳에 떨구고 평온한 마음 안고 집에 가겠다는 의식 같은 것이다.
편의점에 들르자마자 진열대로 가서 커피를 집은 후 계산대로 향했다. 점원은 반대편에서 새로 들어온 물건들을 순서대로 갈아 끼우며 정리 중이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친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네며 황급히 빠른 걸음으로 계산대로 왔다. 그는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계산을 끝낸 다음 조심히 들어가시라며 자신의 일을 하러 갔다.
술 냄새 때문이었는지 술에 취한 얼굴 때문이었는지 그의 눈에 비친 나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람이었다. 고작 몇 초만 기다리면 되는 나에게 그는 짧은 기다림조차 불편을 끼쳤을까 봐 미안하다고 말해주었다. 다시 돌아가는 길을 염려하며 한번 더 인사를 건네는 그를 뒤로하며, 문 밖을 나섰다.
내가 한 것이라곤 짤막한 주문과 돈이 든 카드를 준 것밖에 없는데 그는 커피 한 잔의 값보다 더 큰 마음을 주고 있었다. 입 안 가득 쓰고 텁텁한 것들을 부드럽고 달달한 것으로 바꾸며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