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음 작은 한 구석이어도 돼
늦은 밤, 아이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누워 있기만 하는 아빠'다. 우리는 주말에 집안의 구역을 나눠 청소를 하는데, 나는 보통 거실을 맡고 아이는 안방을 맡는다.
어떤 날은 내가 빨리 거실을 청소하고 바닥에 누워 룰루랄라 할 때도 있는데 아이가 그 꼴을 잘 못 본다. 나를 일으켜 세우거나 또 쉬고 있다고 핀잔을 주거나 방으로 부른 후 청소를 도와달라 한다. 이 모든 것은 엄마에게 혼나는 아빠의 모습을 연출하거나 생각보다 제자리에 둬야 할 인형들이 많아 일손이 부족한 자신을 보조하길 바라는 마음들이다.
나는 아이를 이기지 못하고, 거실부터 방까지 청소를 한다. 그때부터는 룰루랄라 하는 사람이 아이로 바뀐다. 너는 왜 놀고 있냐며 잔소리를 하면, 울고 불고 하며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정리했는지 알기는 하냐며 뭐라고 한다. 억울함 한 스푼, 쏘아대는 녀석에 대한 애정 한 스푼을 담아 가장 따뜻한 온도로 안아주며 해피 엔딩을 맺는다.
그날도 청소를 빨리 끝내고 누워 있었다.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고 있는데 아이가 터벅터벅 걸어오면서 물었다. "아빠, 시나몬롤은 남자게 여자게?", 시나몬롤이라면 토끼처럼 생긴 귀가 내려앉은 강아지 같은 캐릭터로만 생각했지, 성별을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언뜻 풍기는 느낌만으로 "꼬마소녀 아니야?"라고 말을 이었다.
아이는 금세 풀이 죽고는 베란다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앓은 소리로 말했다. "남자거든? 근데 친구들이 자꾸 여자래. 나 속상해." 누구나 생각이 다를 수 있고, 보이는 모습만으론 진실을 찾기 어려울 때가 있다며 아이를 달래고는 분위기를 바꿔 보기 위해 산리오 세계관에 있는 친구들을 같이 알아보기로 했다.
시나몬롤은 하늘에서 내려온 하얀 수컷 강아지로 긴 귀로 하늘을 폴짝폴짝 날 수 있고, 꼬리가 시나몬롤 모양이다. 카페 시나몬의 마스코트인 시나몬롤은 친구인 모카, 카푸치노, 밀크, 에스프레소와 자주 어울린다. 수줍음이 많지만 아주 친절해서 손님 무릎에 꾸벅 잠들기도 하고 손님들을 힐링시키는 요정이다.
시나몬롤은 친구들과 함께 혼란에 처한 도시를 구하기도 한다.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려는 고양이 베리에 맞서는 과정에서 시나몬롤과 친구들은 서로의 용기와 협력을 통해 더욱 돈독해지고 선함을 실천한다.
쿠로미는 검은 어릿광대 모자와 꼬리를 가진 소녀 토끼로 마리랜드에 살고 있는 악동 캐릭터다.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마이멜로디를 자신의 라이벌로 생각한다. 쿠로미는 말괄량이에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속은 걸리시한 취향이 있어 일기 쓰기, 요리, 로맨스 소설 읽기를 좋아한다.
쿠로미는 라이벌인 마이멜로디와 힘을 합치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한다. 특히 쿠로미가 악몽을 모아 만든 다크파워로 인간세계를 어지럽히려고 할 때, 마이멜로디가 등장해 이를 막기도 한다. 이렇게 둘은 같은 세계에 살며 갖가지 일을 겪지만, 쿠로미가 가진 외로움과 그것으로 세상과 어긋나게 된 과정을 이해하게 되면서 선과 악의 구도에서 감정의 오해를 풀고, 화해와 관용의 관계로 나아간다.
마이멜로디는 쿠로미와 같은 마리랜드에서 태어났고 할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신 분홍 후드티를 입고 다니는 소녀 토끼다.
마이멜로디는 엄마와 함께 쿠키를 굽는 것과 가족과 함께 시간 보내기, 그리고 친구인 생쥐 플랫과 노는 것을 좋아한다. 반면, 거짓말을 싫어하고 누군가가 상처받는 것에 걱정이 많다. 그래서 마이멜로디는 솔직하고 정직하며 마음이 따뜻하다. 인간세계에서 유메노 유타라는 소녀와의 연대를 갖고 있는 면모도 있다.
마이멜로디는 성격이 강한 쿠로미와 맞서는 과정에서도 자기감정보다 주변의 감정과 공감을 챙기는 타입으로 부드러운 조정자 역할을 한다. 이렇게 타인을 신경 쓰는 바람에 종종 자신이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밝은 미소와 화해를 잘하는 성격 덕분에 멘털의 회복탄력성이 높은 캐릭터로 자리매김했다.
산리오 세계관을 만든 시타라 시노부는 "작은 선의 교환을 통해 세상의 미소를 만든다."는 메시지를 이 셋의 캐릭터를 통해 전하고자 했다. 시나몬롤, 쿠로미, 마이멜로디는 단지 아이들이 좋아하고 모두가 귀여워하는 굿즈로만 인식되기보다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나타내면서도 인간관계나 감정의 교환에 있어 작지만 커다란 감동이 있는 가치를 담고자 했다.
딸에게 산리오 세계관과 여러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몰랐던 것들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새롭게 발견한 사실에 반가워하며 웃기도 했다. 딸은 연신 미소를 지으며 친구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나도 멋진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물끄러미 이 세계에 빠져 온갖 일들을 상상하고 있는 딸을 보며, 나 역시 나를 강하게 이끄는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딸의 모습을 등장시키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아니 최근 몇 달 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가수 최유리가 만들고 불렀던 <숲>이란 노래다.
조심히 뱉듯 하는 호흡과 따뜻하지만 아련한 시절을 담고 있는 목소리로 읊조리는 도입부, 부서질 것만 같은 나약한 존재가 힘껏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 누군가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는 후반부가 압권인 이 노래는 기쁘기도 하고 절절하기도 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셀 수 없이 들었지만, 매번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건 가사 때문이었다. 화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어 가사를 필사해 보고, 입으로 흥얼거려 봤지만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처음 가사를 읽었을 땐 무엇으로도 곁에 있고 싶어 했던 어느 존재의 독백 같았다. 다시 읽었을 땐 자신을 향한 주문 같았다. 매일 넘어지고 주저앉는 나약함에 용기를 건네는 문장 같기도 했고, 먼발치 떨어져서 여기 있을 테니 힘이 생기면 언제든 천천히 오라고 하는 기다림 같기도 했다.
어디든 분명한 곳에 닿고 싶어 화자가 새긴 문장의 흐름을 따라 걷다 보니 드넓은 세상 속 보일 듯 말 듯 앉아 있는 딸을 만났다. 나의 큰 보폭에 맞춰 그것의 반도 되지 않는 잔걸음으로 뒤따랐던 작은 아이는 어느새 저 먼 곳까지 오르고 나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란 이유를 들어 채 다듬어지지도 않은 아이의 말과 감정을 내 쪽에 맞춰 끊어버리기도 했고, 가장 약하고 어설픈 존재를 돌본다는 생각에 갇혀 좁고 안전한 울타리에만 두려 했다. 그럼에도 먼저 웃어주고 이해하려 하고 사랑으로 감싸줬던 건 딸이었다. 아이가 펼쳐 놓은 순수의 그늘 밑에서 더 힘을 내고, 쉬어도 보고, 여러 갈래길을 걸으려 애쓰는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우리는 언젠가 서로를 온전히 마주하고 이해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영원할 수 없겠지만 채워지는 시간만큼 가진 마음을 다한다면, 숲과 바다의 모습을 닮은 세계에서 마르지 않는 푸르름을 나누고 있지 않을까. 때로는 서로를 몰라 엇갈리고, 오해가 쌓여 멀어지더라도 우리의 마음 작은 한 구석이라도 길을 터 보인다면, 그 길을 따라 서로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난 저기 숲이 돼볼게
너는 자그맣기만 한 언덕 위를
오르며 날 바라볼래?
나의 작은 마음 한구석이어도 돼
길을 터 보일게, 나를 베어도 돼
날 지나치지 마, 날 보아줘
나는 널 들을게, 이젠 말해도 돼
날 보며
아, 숲이 아닌 바다이던가?
옆엔 높은 나무가 있길래
하나라도 분명히 하고파
난 이제 물에 가라앉으려나?
난 저기 숲이 돼볼래
나의 옷이 다 눈물에 젖는대도
아, 바다라고 했던가?
그럼 내 눈물 모두 버릴 수 있나?
길을 터 보일게, 나를 베어도 돼
날 밀어내지 마, 날 네게 둬
나는 내가 보여, 난 항상 나를 봐
내가 늘 이래
아, 숲이 아닌 바다이던가?
옆엔 높은 나무가 있길래
하나라도 분명히 하고파
난 이제 물에 가라앉으려나?
나의 눈물 모아 바다로만
흘려보내 나를 다 감추면
기억할게, 내가 뭍에 나와 있어
그때 난 숲이려나?
최유리, 숲(Fo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