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영어를 쓰는 사람의 머릿속은 이러할 것이다. '아시아인이네! 불어를 못 하는 외국인이니 영어로 말하자'
나도 처음 제네바에 왔을 땐 이를 의아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내 인구의 절반이 외국인인 도시에서 이방인을 대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려니 했다. 영어로 물어오면 영어로 답할 만큼 이런 일이 익숙하다. 서로에게 편한 불어를 두고 돌아가는 것이 우습지만 크게 고생스럽지도 않은 일이다. 프랑스에서 불어를 배울 때 더듬거리며 말을 꺼내면 짜증스러운 얼굴과 마주해야 했다면, 스위스에선 먼저 웃으며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후자가 훨씬 낫지 않은가?
이런 대우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정보 격차다. 내가 불어를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제공해야 할 정보를 충분히 주지 않는다. 상점에서 계산하고 물건을 담고 있으면 다른 손님에게 '회원 가입하면 절반 가격이에요'라는 식의 말을 하는 걸 종종 듣게 된다. 그러면 왜 내겐 말을 안 해주냐며 발끈하는 대신 '방금 얘기하는 거 들었는데, 저도 그렇게 할 수 있나요?'라고 물어본다. 이내 점원은 아차 싶은 얼굴로 미안해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게 차별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순간, 기분이 찝찝한데 내가 예민한 건가 자문하게 되는 순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 모두 인종차별이 맞다. 그것이 개인의 경험이든 무지에서 비롯되었든 간에 피부색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하는 것이니깐. 하지만 이 정도로는 이제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다. 아마 수년간의 해외 생활로 얻게 된 여유 혹은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를 피하려는 방어 기제일 수도 있겠다.
좀 더 적나라한 차별도 있었다.
3월 중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이동제한령이 시작된 날이었다. 재택근무를 시작하기 전이라 어김없이 일터로 가기 위해 트램에 올랐다. 내리려던 남자가 날 보더니 '켁~'하고 가래를 모으는 시늉을 했다. 최대한의 경멸을 담은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내게 침을 뱉지는 않고 낄낄거리며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 갈 길을 갔지만 트램에 남은 나는 그렇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들이닥친 날벼락에 차오르는 눈물을 참아야 했다. 안전하다고 믿어오던 제네바에서 그런 일을 겪게 될 줄 상상하지 못했다.
마스크를 써서 더 눈에 잘 띄었던 걸까? (그때만 해도 마스크 착용을 비웃던 유럽인들이었다)
그 사람을 붙잡고 한마디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 사건에서 아무 잘못도 없는 난 내 행동을 되짚어보고 검열해야 했다. 그 찰나를 수십 번 되감기 하며 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이런 노골적인 혐오는 확실히 아프다.
슬프게도 이런 경험담은 전혀 새롭지 않다. 코로나가 퍼지며 동양인을 향한 폭력 피해를 담은 기사가 쏟아졌다. 이런 일은 당하는 사람에게 크나큰 후유증을 남기기도 하는 불행한 일이다.
최근 조지 플로이드 사망 영상을 본 사람들은 '차마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다.' '이런 일이 또 일어나다니'라고 반응했다. 그야말로 익숙한 불행이다. 익숙함과 불행이라는 두 단어가 한 문장에 놓일 때의 낯섦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인종차별로 인한 비극이 되풀이되다 못해 일상이 될 때까지 손 놓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익숙해져버린 불행을 막는 방법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안의 편견을 버리는 일부터 시작하려 한다. 타인을 정의하기 좋아하는 프랑스인들은 자신의 못된 습관을 반성이라도 하듯 '판단해선 안 돼'(Il ne faut pas juger)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산다.
하지만 과연 판단하지 않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난 도덕적 가치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 신념에 기반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대신 '속단해선 안 돼'(Il ne faut pas préjuger )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판단은 하되 내가 가진 한 줌의 정보만으로 지레짐작하는 습관을 고치자는것이다.
인간극장 굿모닝 미스터 욤비 2, '세상에서 가장 편견 없는 할아버지'
슈퍼에서 내게 어떤 치즈가 낫겠냐고 물어오는 할머니가 있었다. 여기 사람이 아니라 잘 모른다고 했더니 한참을 붙잡고 치즈 강의를 해주셨다. 세상에서 가장 편견 없는 할아버지가 떠오르는 유쾌한 기억이었다.
그간의 유럽 생활을 돌아보면 따뜻한 사람이 훨씬 많았다. 낯선 땅에서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건 쉽게 곁을 주지 못하는 내게 먼저 다가와 준 사람들 덕분이었다. 나 또한 편견 없이 또 다른 이방인을 반겨주며 내가 받았던 다정함과 위안을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