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에서 집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제네바는 스위스에서 임대료가 가장 비싼 도시로, 4인용 아파트(100㎡)의 평균 월세가 3820 프랑 (한화 약 480만 원)에 달한다. 이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부담하고서라도 집을 빌리겠다는 사람이 차고 넘친다.
나도 집 구하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잠깐 머물다가는 젊은이들도 많아 소형 아파트가 나오면 줄을 서서 집을 봐야 했다. 수십 번 지원서를 냈지만 물을 먹고, 일자리 구하는 것보다 더 힘들게 마침내 집을 얻었다. 가구가 하나도 없이 텅 빈 집이어서 이케아에서 산 가구를 직접 조립하고, 중고 가구를 낑낑대며 들고 오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찾은 집이니 나름의 애정을 듬뿍 쏟았다. 그런데 이제 이사를 가려한다.
그 이유는 소음 때문이다. 아파트의 유리창은 얇디얇아 밤새 도로의 소음이 모두 흘러들어온다. 주말 밤이면 들려오는 취객의 난동 소리는 곤혹 그 자체다. 게다가 윗집 이웃이 내는 모든 소리가 다 벽을 타고 내려온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땐 윗집이 비어있어서 몰랐다. 이웃이 이사 온 날 쾅쾅쾅 망치질을 하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부엌에서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망치질을 할 일은 없었다. 말로만 듣던 발망치를 직접 겪게 된 것이다. 그날 내 평화는 끝났다.
낮에는 집을 비우니 괜찮았다. 하지만 늦은 밤과 이른 아침, 쿵쿵쿵 강렬한 발소리에 잠이 깼다. 울림이 너무 커서 우리 집에 누가 쳐들어온 줄 알고 혼비백산이 되어 일어나곤 했다. 그렇게 단잠에서 깨길 여러 번, 용기 내어 윗집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천장에 메아리를 울리고, 벽으로 진동이 전해질만큼의 걸음걸이니 우락부락한 남자를 상상했다. 웬걸, 나만큼이나 왜소한 청년이었다. 나폴리에서 왔다는 그는 남부 사람 특유의 쾌활함으로 날 반겨(?) 주었다. 강한 이탈리아 억양의 말투에서부터 유쾌함이 묻어 나왔다. 말투는 저렇게 사뿐사뿐 날아다니는 것 같은데, 온몸의 무게를 뒤꿈치에 싣고 걷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건물 자체가 부실한 것 같다며 선뜻 집 안으로 들어와 보라고 했다. 새로 이사 온 집도 구경시켜주고 왜 제네바에 오게 되었는지도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다음 집들이 때 놀러 오라는 초대까지 받았다. 집에 내려와서는 뭔가 말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리둥절했다.
얼마 동안은 소음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휴가도 많은지 몇 주씩이고 집을 비우기도 했다. 고요함은 오래가지 않았고 다시 쿵쿵대는 발망치가 찾아왔다. 고통받는 아래층 이웃의 존재를 잊은 것이다. 쿵쿵쿵, 뇌까지 울리는 것 같은 소리를 참다못하고 두 번째 올라갔을 땐 처음보단 무뚝뚝하게 나를 맞았다. 아마 자기도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으니 짜증이 났던 것 같다.
3월 봉쇄령 이후 몇 달 동안은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재택근무를 시작했고, 이웃 역시 마찬가지였다. 얇은 바닥을 사이에 두고 24시간을 함께 하는 기분이었다. 온종일 집에 있어도 대체로 침대나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나로서는 왜 짧은 보폭으로 우다다다 뛰어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 또다시 올라가려다 이젠 서로가 얼굴을 마주하기에 민망한 상황이니 편지를 쓰기로 했다.
편지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어젯밤 또 한 번 당신의 발소리에 잠을 깨고 말았습니다. 건물이 이렇게 허술한 것은 세입자의 잘못은 아니고, 의도적으로 시끄럽게 하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어요. 반복되는 소음에 지쳐 이사를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 집을 못 구했네요.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부동산에 연락해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주의해주세요. 슬리퍼라도 신어주세요.'
다음날 바로 답이 왔다.
'이 상황이 정말 유감이에요, 미안해요. 저도 사실 같은 문제를 겪고 있어 이해할 수 있어요. 제 윗집 사람은 새벽 두 시에도 구두를 신고 걸어 다니거든요. 부동산에 글을 써보는 건 좋은 생각이에요. 아마 문제를 해결해줄 수도 있겠어요. 아무튼 더 푹신한 슬리퍼를 사 신고 조심할게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내 편지의 한 문장 한 문장은 날카롭고 신경질적이었다. 당연히 날 선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 예상했다. 보복 소음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지극히 상식적인 답을 주다니. 대부분 내가 아는 층간소음 시나리오 속의 가해자는 적반하장으로 나와야 했다. 그런 적 없다며 발뺌하고 더 시끄럽게 굴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의 이웃은 완벽한 악역이 되지 못했다. 마음껏 미워할 수 있는 명분이 사라진 것 같았다.
대학원 동기 언니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우리 모두 생전 처음 겪는 학업량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때였다. 언니는 윗집의 아기 소리에 괴로워하다가 윗집을 찾아갔더니, 문을 열고 나온 건 육아에 진이 빠진 젊은 엄마였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연신 고개를 숙이더라는 것이었다. 언니는 되려 자기가 미안해져 눈물이 났다고 했다.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만드는 사람은 꼭 악마가 아닐 수도 있다. 내 일상에서 스트레스의 원천이 되었던 이웃은 내겐 무조건 나쁜 사람이었지만, 연인에겐 든든한 남자친구고 직장에서는 유능한 직원일 수 있다. 내 기준에 맞춰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이분법으로 나누려고 했지만, 현실은 막장 드라마가 아니었다. 그저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보통의 사람일 뿐이었다. 박사모인 삼촌은 나를 유독 예뻐하고, 술만 먹으면 망나니가 되는 내 친구는 내 말에 가장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아닌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대체로 무해하고 가끔 얄밉다가 이따금 좋은 사람이 된다.
이웃이 긴장을 풀면 발망치는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불안은 잠깐 내려놓고, 믿어보기로 하자. 지금은 돈값 못 하는 건물, 리노베이션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집주인을 향한 원망만을 남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