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loe Jun 20. 2020

1인 국민소득 8만 달러,
스위스에서 파업하는 이유

6월 14일 여성 파업

프랑스에 있을 땐 어디 좀 가려하면 파업 때문에 발이 묶이곤 했는데, 스위스는 시계의 나라답게 뭐든 정시에 재깍재깍 도착한다. 역시 살기 좋은 나라는 파업도 안 하나 싶었다.


그러던 작년 6월 14일, 역 앞에서 갑자기 버스가 멈추더니 시위로 정차한다는 것이 아닌가. 바깥을 내다보니 거리는 온통 보랏빛 물결이었다. 보라색 옷을 입고 각종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성평등을 요구하는 시위, 여성 파업(Grève des femmes)이라고 했다.


1991년 6월 14일은 수십만의 스위스 여성이 직장과 가정에서의 차별에 항의하며 거리로 나선 날이었다. 시계 공장에 근무하던 여성들이 성별에 따른 임금 격차에 반기를 들고일어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28년이 지나고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은 문제에 맞서기 위해 또다시 여성 파업을 하게 된 것이다. 


1991년 시위대의 요구 사항은 주로 여성의 근로 조건(임금 격차, 승진, 휴가, 연금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오늘날의 요구는 사회적 측면까지 확대되었다. 성차별과 성폭력 근절, 여성 이민자와 예술가의 권리 보장, 성적 다양성 수용 등을 요구 사항으로 내세웠다. 


"어린이집에 자리가 없다는 말, 남자 동료보다 월급이 적다는 소리가 지겨워 파업합니다."

"가부장 사회와 차별을 견딜 수 없어 파업합니다."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지 않는 세상을 위해 파업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두 세 배 더 큰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여성들을 위해 파업합니다."



2019년 6월 14일 여성 파업 © Le Courrier


주최 측은 일하는 여성에게 14일 하루 동안은 일터를 떠나 파업에 동참할 것을 독려했다. 이민자를 위한 NGO에서 일하는 한 친구는 여성 청소노동자 (이민자 비율이 높은 분야)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모든 직원이 함께 거리로 나섰다고 했다. 이밖에도 일부 기업과 NGO에서는 직원들이 행렬에 동참할 수 있도록 조기 퇴근을 허락했다. 전국에서 수십만 명, 제네바에서만 2만 명이 참가했다고 하니 스위스에서 정말 보기 드문 인파였다. 주최 측은 2019년 여성 파업을 스위스 여성권 역사에 기록될 성공적인 시위로 평가했다.   


시위에는 젊은 여성뿐 아니라, 28년 전 시위의 최전방에 섰고 이제 중년이 된 여성들도 함께했다. 많은 남성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위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등 손을 보태었다. 또한 파업에 나선 여성 동료의 대체/추가 근무를 하는 남성도 많았다고 한다. 모든 연령대의 여성이 주체가 되었고, 성차별이 결국엔 누구에게나 해가 된다는 걸 이해한 현명한 남성들이 지지의 손길을 보낸 것이다. 따뜻한 연대의 순간이었다. 저녁에는 여성에겐 축제를 누릴 자격이 있다며 공원에 무대를 설치해 여성 예술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여성 파업의 날은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었다. 



2020년 6월 14일 여성 파업


내겐 너무나 신선하고 고무적이었던 이 시위를 올해도 보길 바랐으나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취소되는 듯했다. 그러나 요구 사항 대부분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한 여성들은 시의 허가를 받아 작년처럼 진행했다. 대신 대규모 행렬과 공연은 취소되었다. 나도 마스크를 쓰고 거리에 나섰다. 


올해 6월 14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직장 파업을 하려면 날짜를 당겨서 시행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날짜를 바꾸지 않은 이유는 노동 시장의 유연화로 일요일에도 일하는 여성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무임금 돌봄 노동, 가사 노동은 일요일에도 계속되므로 일요일의 여성 파업이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이동제한령을 시행했던 스위스는 식료품점, 약국 등의 '필수' 상업만 문을 열어두었다. 이 시기에 많은 이들이 우리 삶을 영위하는 데에 '필수' 산업으로 분류되었던 교육, 보건, 위생, 서비스 분야에는 여성의 비율이 특히 높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필수적인 일자리의 처우가 열악하다는 사실이 바이러스로 인해 재조명받게 된 것이다. 


삶의 질이 높기로 이름난 스위스에서도 파업을 한다. 전 세계에서 지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고,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 친절한 이웃의 층간 소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