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여자들은 일을 시작할 때 남편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걸까요?"
같은 반 수강생들과 점심을 먹던 중 한 친구가 물음을 던진다.
"그러게요. 집에서 살림하는 아내에게 밖에 나가서 돈 벌어오라고 재촉하는 남편들도 더러 있던데...
알아서 돈을 벌어오겠다는 대도 반대하고, 월 500만 원을 벌 수 없으면 가정이나 잘 꾸리라는 둥.
응원은 못해줄망정 초반부터 초를 치네요. 사기 떨어지게."
대화를 듣던 이들의 동조가 이어진다.
"맞아요. 저는 이 일을 배우면서부터 남편과 매일 전쟁이에요.
제가 장거리로 일하러 가는 것도 싫어하고, 일 자체를 반대하네요.
이제는 사회에서 내 이름 걸고 일하면서 수입을 벌고 싶은데..."
"왜 반대하는 거예요?"
"그냥 제가 집이나 지키며 살았으면 좋겠나 봐요.
그렇다고 애들을 돌봐주는 것도 아니고 살림을 분담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사나 싶네요."
경력단절. 이 네 글자에서 느껴지는 씁쓸함 탓인지 부른 배가 금세 꺼져버렸다. 20대에 직장 다니며 커리어를 쌓다가 결혼하고 아이 낳아 살림을 도맡게 된 여성들. 아이가 커갈수록 '나'라는 존재, '내 이름 석자'가 빛바래지는 여성들. 자의 반 타의 반 선택으로 안주인 역을 해내고 있었지만 이면에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늘 도사리고 있었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 살아오며 자신만의 이름이 말라가는 것을 목도하는 것은 그저 우리의 몫이었다.
이제는 사회의 일원으로 나의 영역을 확립하고픈 사람들. 수강 과목이 낯선 분야지만 도태되지 않으려 눈에 불을 켜고 수업에 열중하고 있다. 언젠가 이 사회에도 내가 쓰일 자리가 있겠거니 기대하면서, 한편으로는 긴장하면서. 그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배우자의 응원과 지지였다. 아이들에게는 '넌 할 수 있어. 빛나는 존재란다.' 다정하게 말해주면서 왜 자신의 배우자에게는 응원대신 질타와 회유를 투척하는 것일까. 단 천 원을 벌더라도, 뭘 해내더라도 내 힘으로 이루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 것인지 모르쇠 하는 것인지.
대화의 결론은 '투쟁'이었다. 밖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붙잡는 자를 향한 우리들은 지금보다 더욱 대담하게 굴기로 담합한다. 시작은 미비해도 뭐든 하기 나름. 수입이 적건 많건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는 거다. '맨땅에 헤딩'. 밑져야 본전임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발을 끌며 나아간다.
남편들이여, 아니, 우리를 지켜보는 이들이여.
눈에 켜진 불을 끄고 반쯤은 감아주길.
힘내라는 말을 거둬도 좋으니 두 손 두 발을 막지만 말아줬으면.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이 서로의 관계, 우리의 현실과 일맥상통함을 느끼는 날들이다. 경력단절을 탈피하려는 여성들에게 심심한 응원을 보낸다. 중간에 그만두더라도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세상에 물들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