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 적절한 침묵

by 필경

오랜만에 N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폰 화면 속 N의 이름이 뜰 때면 나는 전화를 받을지 말지 망설여진다. 무슨 일로 전화했을지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십 년 지기 치고는 가물에 콩 나듯 전화하는 N은 자신이 하고픈 말만 잔뜩 쏟아내고는 “다음에 또 전화할게”라는 마지막 인사말로 전화를 끊는다. 휴대폰에 붙은 얼얼해진 귀를 떼어내면 빨갛게 익어있다. 나의 머릿속은 한바탕 폭풍우가 휩쓸고 간 폐허처럼 멍해진다. 통화 시간의 90퍼센트가 N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그 후로 몇 차례 이런 식의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N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서로에게 긍정적 영향을 주지 못하는 관계라면 다음을 고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오랜 사이라 해도 말이다.


“여보세요.”

“나야, N.”

“무슨 일이야? 바쁘면 카톡으로 보내도 되는데.”

“바쁘기는. 네 안부가 궁금해서 전화했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N은 지난 통화 이후로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겪은 부당한 일부터 동료들에 관한 험담이 쉴 틈 없이 쏟아졌다. N의 편을 들어주다 보면 “어떻게 들어간 직장인데 그만두니, 얘는 가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처럼 말한다니까” “너 말고는 말할 사람이 없어”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러고는 이어서 자랑을 늘어놓는다. N의 유일한 희망인 아들. 나는 그의 이상형, 취미, 식습관, 해박한 재테크 지식, N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효심 등 알고 싶지도 알 필요도 없는 내용들을 들어야만 했다. “지난번에 내가 말했는데 내 말 안 들은 거야, 섭섭하다 얘” 이 말을 피하기 위해.


학창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유난히 입담이 좋았던 N. 나는 그런 N을 사랑했고 함께 대화하는 게 즐거워 몇 시간이고 통화하곤 했다. N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결혼도 사회에도 나보다 먼저 첫발을 내디뎠던 N은 더 이상 예전에 알던 추억 속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인생의 굵직한 이벤트를 겪고 나면 나처럼 되는 거야,라고 보여주는 것 같아 어쩐지 서글퍼졌다. 내 기억 속의 N과 나는 넘어져도 깔깔대며 웃었고, 여전히 그럴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는데.


일정한 패턴과 좁아진 폭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우리가 잃게 될 것을 나는 알고 있지만 N은 아직 모르는 것 같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N을 떠올린다. 산란하고 불안한 그래서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지 못하면 자신을 잃을 것 같은 마음. 자기 밖에서 찾으려는 위안과 만족. N이 없는 N의 이야기와 내가 없는 우리의 대화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덧붙여 다음이 주어진다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우리 사이에는 적절한 침묵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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