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영화 나비, 어른들의 일

청년들이 나비가 될 수 있길 바라면서

퀴어영화 <나비, 어른들의 일>을 접하기 전 이 영화가 백인규 감독의 전 작품인 <20>과 시리즈로 연결되는 작품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영화를 감상하게 되었는데 전작이 청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이 이야기는 청년과 성인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감독이 무엇을 말하는 지를 좀 더 알고 싶은 분들이라면 그의 전작인 <20>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우선 이 영화를 보기 전 왜 감독은 청년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는지에 대해 궁금했었다. 감독은 어쩌면 단순히 게이들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영화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럼에도 만약 게이에 관해 반감을 가지신 분들이라면 잠시 돌아가셔도 괜찮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보실 분들이면 지금부터 같이 이 영화를 읽어 보려 한다.


삼포세대를 지나 이제는 N포세대로 불리는 청년들

'88만원 세대'라고 불렸던 세대를 지나 어느 순간 부터 '삼포 세대'로 불리게 되었던 청년들이 이제는 포기한 것이 너무나 많아 'N포 세대'로 불리고 있다. 그 포기한 것에는 취업도 포함되어 있다. 취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개인의 사정도 어느 정도는 있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회에서 '열정페이'와 함께 청년들의 인력을 '공짜'로 쓰려고 하는 사회의 잘못된 습관들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

남의 돈을 버는 것이 당연히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상당히 많은 사업가들이 고용한 사람에게 주는 돈을 아까워 한다. 그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고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님에도 그들의 일에 대한 보상을 '열정페이'라는 것으로 그저 강탈한다. 이것이 악순환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청년들이 안정이 되어야 사회의 기초가 튼튼해지는데 그 인력이 나가면 또 누구라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인력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서 문제는 발생하게 된다.

청년들이 직업을 구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고용주들로 부터 피해를 받기보다는 보다 안정된 회사를 고르다 보니 직업을 구하는 게 늦어지고, 그러다보니 경력은 없는 상태서 스펙만 쌓기 위해 모두가 스펙경쟁 사회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의 시스템이 망가지면서 청년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는, 급기야는 N포 세대가 되어 가는 것이다.

영화 '나비, 어른들의 일'에 나오는 청년들도 이십대에서 삼십대에 해당되며 이와 같은 취업문제로 취업을 포기하고 게이바에서 일을 하게 되는 위태로운 이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들을 옹호하는 것이 아닌, 왜 라는 질문조차 하지 않고 그저 그들을 묵묵히 따라만 간다.

위태로운 청년들, 돈의 노예가 되다

돈이 우리의 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도 부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돈보다 더 중요한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경제가 어려워지고 부터 돈에 매여 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느새 당연시 되어 가고 있다.

"돈이 없으면 안쓰면 되지"라고 남의 말을 하듯 할 수 있지만 남을 만나는 것도, 어디를 움직이는 것도 뭐든지 돈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사회의 풍토가 개인으로 하여금 돈으로 부터 위축하게 만들고, 돈에 의존하고 마침내는 돈 때문에 빚을 지게 만든다.

돈이 삶에 깊숙히 들어오고 그 돈으로 하여금 삶을 지배하게 만든 인생을 살아가는 부분은 분명 개인의 잘못도 일정 부분은 있다. 하지만 사회가 어느 정도의 복지를 담당해야함에도 이 부분을 개인에게만 돌리고 있어 그만큼의 돈을 스스로가 부담하게 되면서 개인은 더욱 가난하게 되고 나라만 부강하게 되고 있는 기형적인 형태가 최근 10년동안 이뤄지고 있다.

이 부분을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지 개인과 사회가 함께 충분한 고민을 해야함에도 현재는 그런 고민을 하지 못하는 미 성숙한 시대를 보내고 있다. 그저 오늘을 견뎌내는 데에도 버거워 하며 살아간다.
영화에서는 큰 돈을 벌기 위해 게이바에서 일을 하게 되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들의 '한탕주의'를 비난만 할 수 없는 이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 누군가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섹스에 젖은 청년들, 그들의 비상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을 한다. 그리고 어쩌면 그 변화의 폭이 더 빨리 찾아오기를 바라면서 '한탕주의'를 바라는 이들이 더러는 있을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면서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기를 꿈꾸는 것은 사막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싶다.

자극적인 것에 사회가 노출되고 어느 순간부터 둔감해 지기 시작하면서 누군가는 개인의 성(性)을 사고 누군가는 자신의 것이 소중한지 모르고 돈을 버는 것에 급급한 체 스스로의 하루 하루를 죽이며 살아간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팔리는 그 과정 속에서 자아가 울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 체 하루 하루를 버텨낸다. 언젠가는 이 생할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기약없이 지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생활은 지속하면 할 수록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개미지옥처럼 계속 빠지고만 만다. 언젠가는 그 삶에서 더 나은 삶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영화에 나오는 청년들도 그렇게 믿고 게이바로 발을 들어 놓은 건지 모른다. 지옥같은 삶을 벗어나기 위해 왔지만 더욱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있는 건 자신이라는 것을 모른 체 언젠가 날아오르기를 기대한다.

다시 나비가 될 때까지

애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었던 건 성충이 되고 번데기가 된 후 모진 비바람과 천직에게로 부터 이겨낸 후 받는 보상이다. 과정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결과가 찬란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없이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건 욕심일뿐이다.

영화에 나오는 청년들은 애벌레처럼 앞으로 나비와 같은 삶을 꿈꾼다. 하지만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스스로 거짓된 주문을 하며 희망을 찾는다. '괜찮아질거야' 라고 말이다. 그들이, 현실에서 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희망은 그 '개미지옥'의 삶 끝자락에서는 찾을 수 없다. 설령 그 전의 삶보다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해도 그 뒤에 찾아오는 헛헛함을 어떤 걸로 채워 넣을 수 있을까.

그것이 진정으로 '나비'가 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그 구렁텅이에서 꺼내주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애벌레'는 나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정답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떳떳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간다면 적어도 '나비'가 될 수 있는 자격은 되지 않을까.

영화 <나비, 어른들의 일>에 나오는 청년들도, 현실에서 어쩌면 그 세계에서 나올 수 없게 된 어떤 이에게도 희망이 찾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용기를 갖고 자신의 삶을 다시 개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말처럼 '진정으로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줄테니 말이다.

백인규 감독의 퀴어영화 <나비, 어른들의 일>

작가의 이전글영화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