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산뜻한 날씨에 불현듯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 어린이대공원을 다녀왔다. 학교에 가도 늘 혼자 다니는 신세, 집도 멀어서 과 개강파티 같은 것도 장장 왕복 4시간의 통학시간 떄문에 제대로 참여할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 내 활동반경이라고는 집과 학교 뿐이니, 답답하기 그지 없음은 물론이요, 봄은 가장 우울한 계절이라 했던가, 다른 사람들은 그토록 행복해보이는데 나는 외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나는 늘 어딘가 외출을 하면 친구나 연인 같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촌스럽게도. 게다가 이런 날씨에 이런 계절이라면 더더욱 그러해야 하는데... 하는데.... 하다가 문득 오기가 생겨 그래, 혼자라고 나가면 안되는 법이라고 있냐는 마음에 걸음을 옮긴 것이다.
최근 나의 마음상태는 외로움만이 아니었다.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진로나 인간관계나 여러면에서 고민이 생긴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거의 없다시피한 친구관계도 그렇고 모솔 신세를 못 벗어난 것도 걱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진로가 최근 가장 큰 고민인데, 구체적인 직업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태도나 가치관 등 인생철학과 관련된 복합적이고 모호한 고민거리였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표현으로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라는 의문이라고나 할까?
새해 인사말로 썼던 글에서도 말했듯이 고등학교 때 얻은 우울증 이후로 나는 낭만적이고 이상을 추구하는 쾌활한 성격을 잃게 되었다. 대신 현실을 회피하고 쉽게 자신의 목표를 포기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물론 유유부단한 성격이라도 자신이 그 삶에 만족한다면 상관없지만 문제는 이전에 진로로 결정했던 내용이 너무나도 구체적으로 계획된 자신만의 가치관 실현이었던 것이다.
청소년기의 나는 선하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어가고픈 건설적인 꿈이 있었고 그런 까닭에 사상가나 문학가가 되어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그게 엄청나게 거시적인 목표라는 걸 그 당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세계 최고의 석학이 되거나 작가가 되어서 세상을 바꾸는 그런 꿈이 아니고서는 딱히 남들처럼 평범한 목표라는 걸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삶이 늘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자신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끝간데없이 높은데 다니는 대학도 평범, 나 스스로의 재능도 평범, 어쩌면 평범 이하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니 피곤하기만 할 뿐이다.
기준을 낮추는 것은 아직 내 청춘의 가능성과 지금까지 그 목표를 위해 쌓아온 그나마의 성과를 생각하면 아쉽고, 다시 용기내어 꿈을 꾸자니 그토록 열정적인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이야 세상을 바꾸고 그런 것이라기보다도 나의 글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삶을 위로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를 위해 치열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과연 인생이란 건 대충 살아도 되는 걸까? 그냥 되는대로 살면 안 되는 걸까? 그냥 지금 당장의 즐거움에만 집중하며 제멋대로 살면 되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지하철에서 내리니 찬란한 저녁 노을에 아이들이 놀고 있고, 어여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걷고 있고, 무슨 대궐의 현관 같은 간판에 어린이대공원이라고 쓰여져 있는 장면은 정말이지,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이 있을까 싶을 만큼. (참고로 나는 서울 토박이다...) 그렇게 공원 안으로 들어가자 정자가 호수에 떠있고 더 넓은 광장과 동물원과 식물원 그리고 카페테리아로 가는 길이 보였다. 그리고 어느 오르막길이 카페테리아 옆에 보였는데, 위의 경치가 좋을 듯 싶어 올라가 보았다.
발을 내딛고 본격적으로 숲에 들어서니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왔다. 아래로는 들판에 소풍을 나온 사람들도 보이고 저 멀리로는 세종대학교 캠퍼스도 보였다. 월화수목 하루종일 도시의 미세먼지만 먹으며 다니다가 서울 한복판에서 이렇게 상쾌한 공기를 마시니 편안하면서도 사색에 잠기게 되는 고요함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나는 지금 공원의 이정표를 보고 걷고 있지 않다. 내가 발길이 닿는대로 걷고 있다. 화려해보이는 연인들도 지금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왁자지껄한 대학생들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나 홀로 이 고요한 길을 걷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떤 길로 가든지 내 마음은 행복으로 충만했고 이미 내가 원하는 길을 자유로이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꼭 청춘의 결말을 정해놓을 필요는 없는 거야.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불완전하더라도 어떤 면에서든 해피엔딩일 테니까. 내가 가야만 하는 길인지도 내가 원하는 길인지도 모르지만 마음이 내키는대로 일단 가보자. 이건 방황이 아니야. 성장이지. 산책로를 걷자니 숲이 내게 대답하는 듯 하다. 길을 묻느냐? 이미 걷고 있지 않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