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최초의 통계실험이 이루어진 1920년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최초의 통계실험이란 홍차에 우유를 붓는 순서를 두고 벌어진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통계학의 대부인 피셔가 만든 것으로, 8개의 잔 중 4잔은 우유를 먼저 부은 홍차를 담은 상태에서 다른 4잔은 홍차에 우유를 부은 다음 당시 우유를 먼저 따르는 쪽이 더 맛있다고 주장한 브리스톨 부인이 양자간의 맛을 구별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브리스톨 부인은 차의 맛을 8잔 모두 구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작가가 이를 언급한 이유는 이 최초의 통계실험에 계급의 차이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당시 빅토리아 시대에는 식기가 질이 좋지 않았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 쉽게 찾잔이 금이 가는 경우가 잦았던 것이다. 한편 상대적으로 높은 계급에 있는 사람들은 튼튼한 찻잔을 살 형편이 되었기 때문에 굳이 찻잔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우유를 먼저 붓고 홍차를 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안타깝게도 브리스톨 부인은 높은 계급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와 같은 물질적 재화와 소비의 매커니즘을 단순히 취향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사회학적으로 설명한 학자중에는 <유한계급론>으로 유명한 베블런이 있다. 베블런은 '유한 계급'이라는 용어를 통해 당대의 계급사회는 사회적 유용성이 아닌 지위를 나타내기 위한 과시적 소비를 통해 구별되었음을 비판했다. 오늘날의 유행이나 과시적 소비의 개념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유한 계급은 새로운 엘리트로 대체 되었다. 또한 그동안 과시적 소비가 소수의 계급만의 전유물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경제적 발전으로 인해 물질적 재화를 통한 계급 과시는 보급화되고 말았다.
베블런이 말한 유한 계급은 자신이 중간 계급과 달리 여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지만, 최근의 통계를 보면 오히려 부유층의 여가 시간은 줄어드는 한편, 저소득층의 여가시간은 역으로 늘어나고 말았다. 능력주의와 경제적 재구조화(신자유주의)로 인한 일자리의 변화가 그 원인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이제 더이상 물질적 과시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날, 계급은 어떤 방식으로 구분되는가? 이제 신(新)경제가 제품 생산에서 아이디어 생산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만큼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계급, 즉 창조계급이 새로운 상위 계급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를 작가는 조금 더 심층적으로 구분하기 위해 '야망계급'이라고 명명한다. 앞서 언급한 창조계급에는 각종 전문직(금융,법조계, 의학계 등등)이 포함되지만 더욱 넓게 보자면 그 틈새에 살고 있는 '지식인' 계층이(예를 들면 아직 시나리오를 팔지 못한 극작가와 같은) 들어가기도 한다. 이들은 소득 수준보다는 사회규범과 문화적 관습으로 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들의 야망은 부를 축적하고 포브스지 세계 부자 순위의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깨어있는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문화적 사회적 실천을 이루려는, 한마디로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열망인 것이다.
그러나 언뜻 무해해 보이고 심지어는 유익해 보이기까지 하는 야망계급에 대해 작가는 오히려 슈퍼리치나 19세기 유한 계급보다 더욱 위험하다고 말한다. 이들의 비과시적, 문화적 소비는 실제로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실제로 이러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결정권자'가 되기를 '야망' 한다는 점에서 물질적 한계를 넘어서 정신적인 계급을 창출해낸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소비를 통계적으로 분석해보면 주요한 소비인 "교육, 의료,육아"에 더 치중해 있는 반면에 저소득층, 중간 계급을 포함한 집단들의 소비는 물질적 과시를 위한 비교적 핵심적이지 않은 것들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앞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미다스의 손처럼 저소득층은 정작 미래를 설계하는 데에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하거나 얻으려고 하지 않은 결과로 후세 사람들간의 불평등이 계속 가속화되며 세습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자본의 불평등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최근 이슈로 떠오르는 것이 능력주의이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사회를 진보시키고자 하는 야망 계급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남들과 다른 것, 완벽한 토종 토마토를 먹고, 모유 수유를 하고 유기농 농산물을 소비하는 것이 당신들이 염원하는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즉 소비는 어떤 종류이건 간에 타자를 만들어내는 것으로써 계급이라는 벽을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발생시키기 때문에 '진보'는 커녕 불평등을 심화,고착화 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야망계급론'의 궁극적인 의의는 자본은 세상을 바꾸는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최근 사회구조의 전복이나 인간 종의 이데올로기 자체를 탈바꿈하자는 일종의 거대 담론을 창출하지 못하고 생활 속 사소한 불평등, 문제들에 대해서만 깨어있는 양 항의하는 지식인층이 무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