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 지나고까지(나쓰메 소세키)
- 1. 목욕탕에 다녀온 후
게이타로는 성과없는 취직 활동이 지겹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희한한 공상을 하며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으며 한때는 고무농장을 짓겠다는 대담한 꿈을 꾼 적도 있다. 호랑이 가죽으로 장식된 집에 일본도를 놓은 거친 모험의 세계를 즐겨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현실적인 면도 있어서 주판을 볓번 돌려보더니 이내 수지맞지 않는 장사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금방 포기했다. 이 평범하고 아무런 영양가 없는 취준생활에 진절머리가 난 게이타로는 정신적 피로를 풀기 위해 목욕탕에 간다. 그리고 모리모토 씨를 만나게 된다.
모리모토란 남자는 누구인가? 자, 여기서부터는 미스터리의 영역이다. 작가는 이 단편의 끝까지도 그의 과거가 어떠했는지를 단정 짓지 않는다. 관청 직원으로서 같이 하숙집에 묵는다는 이 사람은 꽤나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모양이다. 하숙집 안에서 그에 관한 여러 소문이 도는 것을 보니 말이다. 목욕탕에서 그를 마주쳤을 때 게이타로는 모리모토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아니, 정확히는 일말의 동경심과 호기심 같은 것이라고 하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게이타로에게 모리모토의 화려한 말재간과 흥미로운 그의 모험담은 마치 그에 관한 소문이 다 실제인 듯 하고 자신이 그토록 염원하던 모험과 낭만의 세계를 발굴한 듯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점차 모리모토의 이야기 소재가 떨어지고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이 나온다거나 자신만의 개똥철학을 늘어놓는 상황이 오자, 게이타로는 모리모토에 대해 흥미가 떨어진다. 어느 날, 모리모토가 느닷없이 사라지자, 하숙집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리모토에 대해 궁금해했고 심지어는 집주인이 게이타로에게 모리모토의 소재에 대해 물어보기까지 한다. 물론 모리모토에게 빈정이 상한 게이타로는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뒤 왠지 평소에 모리모토가 그의 아내라고 묘사하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와서 그로부터 온 편지를 받기까지는. 그래봤자 편지의 내용은 평소의 허무맹랑한 이야기 조금과 자신이 직업을 구했으니 꼭 월세를 갚겠노라는 약속일 뿐이었지만.
모리모토는 진정 세상 풍파를 다 겪은 인물인가? 아니면 아직 환상을 꿈꾸고 불잡을 수 있는 청춘을 부러워하는 것일까? 이 소설의 주인공, 취준생 게이타로는 나를 닮았다. INFP의 전형으로서 이상과 낭만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자신의 나약함에 갇혀 공상만 할 뿐이지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쉽게 꿈을 포기한다. 그럼에도 낭만을 추구하는 그 태도, 그 순수한 갈망만은 놓을 줄을 모른다.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돼서 이 지경이라니, 소세키는 미래를 내다보기라도 한 것인가?
모리모토는 어쩌면 게이타로보다도 더 어릴 적부터 낭만을 쫓다가 큰 실패를 맛본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대로 된 대학 학위마저도 없는지도 모른다. 그가 게이타로에게 들려주는 소위 ‘왕년’의 이야기는 사소한 일상의 모험을 부풀린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은 모리모토가 월세를 내지 않고 도망친 상황으로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게이타로도 그와 같이 될까? 게이타로가 취업을 한다 해도 언제까지나 낭만을 포기하지 않고 언젠가 자신만의 별을 쫓을 것인가? 도망친 모리모토를 본 게이타로는 과연 어떤 심정일까? 나라면 미래에 대한 불안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작가는 모리모토가 놓고 간 지팡이를 볼 때마다 게이타로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고 말했을 뿐이다.
인생의 치열함이란 무엇일까? 평범함보다도 안쓰러운 애매한 비범함. 이 안일한 답답함은 무엇일까? 이 작품집의 제목은 천일야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춘분이 지나기까지 소설을 완성하기로 했다는 말 그대로다. 소세키 본인은 시시한 작명이라고 하지만 그는 내게도 하나의 챌린지를 준 셈이다. 1. 목욕탕에 다녀온 후 다음의 결말 부분까지 이어지는 단편들을 읽으며 내 나름의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춘분이 지나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