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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환 Oct 14. 2020

[하이자오 7번지] ‘역사적인’ 러브 레터

일제 치하를 기억하는 대만의 방식



오랫동안 한국과 대만은 같은 선상에서 분석되곤 했다. 오랜 봉건사회, 일본의 침략, 권위적 정권에 의한 경제성장 등. 일본의 식민지지배 역사에 대한 대만사람의 인식은 어떨까. 흥미로운 영화가 있다. 2008년 개봉하며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영화 <하이자오 7번지>라는 작품이다.


2008년 대만 최고 흥행작품


지난 2008년 대만에서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작품은 <다크 나이트>도, 오우삼 감독의 <적벽대전>(1부)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트 <아이언 맨>도 아닌, 대만영화 <하이자오 7번지>(위덕성 魏德聖 감독, 海角七號 2008))라는 영화였다. 대만에서는 그해 8월에 개봉되어 5억 3천만 NT$ 라는 엄청난 흥행기록을 세웠다.  대만 자국영화 <하이자오 7번지>가 이안 감독의 <색계>는 물론이고 난공불락의 <타이타닉>의 기록을 ‘위협’했다고 한껏 흥분한 것이다. 과연 <하이자오 7번지>는 어떤 영화일까?


대만 본토박이 악단, 일본향수에 도전하다


영화는 대만의 남부 작은 해안마을 헝춘(屛東縣 恆春鎭)을 배경으로 한다. 짐작하다시피 대만에서도 이런 작은 소도시의 웬만한 젊은이는 이미 도회로 다 빠져나간 상태이고, 오히려 외지인들이 경치 좋은 곳을 리조트로 개발한다고 설친다. 이런 해안마을 리조트 호텔에서는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 중이다. 해변 모래밭에서 일본 톱 가수를 불러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마을 상황에 분통을 터뜨리는 ‘주민대표회의 주석’(우리 식으로 보자면 공연허가권을 쥔 마을자치회 회장님)이 공연조건을 하나 내놓는다. 이 지역 마을사람들로 구성된 악단의 연주를 포함시켜야 공연을 허가하겠다고. 회장님의 ‘우리마을 살리기’ 사랑은 갸륵하지만 이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악단(밴드)을 꾸릴 수가 있을까. 다행히 나름대로 음악을 좋아하는 멤버가 하나둘 합류한다. 가수하겠다고 타이베이(우리의 서울)로 올라갔다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한 아가(阿嘉), 오토바이 수리공이면서도 뭐든지 두드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저씨, SWAT에서 작전 중 다쳐서 이 시골마을로 요양 겸 내려와서는 교통순경을 하고 있는 라오마, 그리고 자신은 국보급 무형문화 전승자라고 자처하는 할아버지, 호텔로비에서 신상품 주류 마케팅에 열정적인 객가(客家)인, 게다가 마을 교회에서 성가대 피아노 반주를 하고 있는 초등학교 여학생까지. 이들 악단을 코디하는 것은 이제는 한물간 모델 출신의 일본여자 도모코. 도모코는 중국말도 그럭저럭 해서 통역까지 겸하고 있다.


일제식민 지배의 그림자 (1895년~1945)


 대만의 시골마을 인적구성을 보여주는 멤버들이 각자 자기들의 사연을 펼쳐놓으면서 공연준비를 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와 함께 대만 과거사의 연결고리를 꺼내놓는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 대만에 있던 일본인들은 대형화물선을 타고 쫓기듯 대만을 떠나갔었다. 그 해(1945년) 12월, 그 화물선에는 젊은 일본인 선생 한 명도 있었다. 그는 대만에 있을 때 대만의 여학생을 사랑했었는데 함께 귀국하지 못하고, 사랑한다는 고백도 채 못하고, 숨어서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그 대만 여학생은 부두에서 곱게 차려 입고 가방까지 꾸려서는 함께 떠날 준비를 했지만 결국 홀로 남겨진 것이다. 그 일본인 선생은 배에서 편지를 쓴다. 모두 7통의 편지를 남긴다. 그리고 60년이 지나, 그 일본인 선생이 죽고 그의 딸이 부치지 못한 그 7통의 편지를 발견하고는 대신 늦게나마 대만으로 편지를 보낸 것이다. [대만 헝춘 하이자오 7번지, 도모코 상] 앞으로. 하이자오 7번지라는 행정구역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일본인에게 버림받는 대만 소녀는 아직 살아있을까?


일본에 대한 근대화인식 문제


이 영화는 대만근대사와 관련하여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나라는 일제치하 36년(1910년~1945년)을 보통 치욕적인 피압박의 시대로 결론 내린다. 몇몇 경제사학자들이 여기에 대한 학문적 반론을 펼치기도 하지만 그런 주장은 언제나 소수의, 불온한 사상으로 취급받는다. 역시 대만도 비슷하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청은 대만(과 그 주위 섬)을 일본에 할양한다. 그로부터 1945년 물려날 때까지 50년이 그들에겐 ‘일제치하’였다. 그런데 대만은 우리보단 조금 느슨한 역사인식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전까지 대만이란 섬은 중국으로부터 거의 버림받은 땅이었고 발전의 기미가 없는 벽촌이었다. 그런데 일제 치하에 산업자본이 들어왔고, 공장이 들어섰으며, 근대화의 씨앗이 뿌려졌기에 오늘날의 대만경제가 활짝 꽃을 피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대륙이 공산화된 후, 그리고 반백 년 동안 생존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선 현실주의적인 역사관을 고착화시켰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일본에 대한 향수가 우리와는 다른 면이 있다. 그 후에도, 대만에서는 할리우드 영화가 극장가를 휩쓸 동안 TV드라마와 만화책, 음반시장은 일본 산(産)이 점령했고, 대만 국민들은 일본에 대해 그다지 반감을 갖지 않았다.


그런 관념상의 차이 때문인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일본 인식’의 문제는 토론거리이다. 60년 전에는 일본남자와 대만여자가 연애를 했고 일본남자는 대만여자를 내팽개치고 가버렸다. 60년 후에는 대만남자와 일본여자가 하룻밤 사랑을 하고 대만 남자는 일본여자에 경도된다. 흔하디흔한 국제적 연애를 다룬 로맨스?


대만 영화가 최고 흥행기록을 세우자 이 영화는 곧바로 중국내 상영을 추진했다. <타이타닉>도 무찌른 자랑스러운 대만영화로 기억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중국 상영에는 조금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중국 고위층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민초들의 일본인식에 황민화교육의 그림자, 일본 식민지문화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고 촌평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아마도 그런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중국 개봉이 한차례 연기되었고 작년 발렌타인데이에 몇몇 장면이 편집되어 개봉되었다. 물론 일본에 대해 악감정이 여전히 남아있는 중국에서는 그다지 큰 흥행기록을 세우진 못했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으로서는 아무리 영화라고 해도 ‘잊고 싶은 영역의 사실’에 대해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몇 년 전 일본작가의 소설 <요코 이야기>소동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이 영화에서 ‘60년 전의 부치지 못한 편지’는 가해자의 사과인 셈이다. 중국에서 개봉될 때 삭제된 장면에는 이런 게 있다. 도망가는 귀국선에서 일본 선생이 쓴 편지내용 중 일부이다.


 “토모꼬. 나약한 날 용서해 주기 바란다... 우리는 전쟁에 졌다. 나는 패전국의 국민이다. 귀족의 자긍심은 순식간에 죄인의 굴레로 떨어졌다. 나는 단지 가난한 교사일 뿐이다. 왜 민족의 죄를 짊어져야하는지.. 시대의 숙명은 시대의 죄이다. 나는 가난한 선생일 뿐이다. 널 사랑했다. 널 버려야만 했다....”


극중에서 대만 노친네가 흥얼거리기도 하고, 영화 마지막에 대만 가수와 일본초청가수가 함께 부르는 노래는 <<들장미>>이다. 슈베르트의 곡이지만 일제치하 때 일본에 의해 식민지 대만에 널리 보급된 민족(?)가요인 셈이다. 아마도 일제치하의 아름다운 시절(만)을 기억하려는 대만민초들은 그 옛날에 그들의 할아버지 세대가 불렀던 그 ‘들장미’에 기이한 향수를 느낀 모양이다.


이런 대목만 떼어내서 본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대만에서도 이 영화 개봉과 함께 역사인식 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대만영화의 자긍심을 높인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위덕성 감독, 바퀴벌레와 싸우며 만든 영화


이 영화의 모티브는 ‘60년 만에 배달된 편지’이다. 실제 대만에서는 몇 년 전 일제시대 주소로 배달된 편지가 한 우체부의 노력으로 그 주인을 찾았다는 뉴스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위덕성(魏德聖,웨이더셩) 감독은 그 내용을 바탕으로 이런 멜로드라마를 만든 것이다. 제작비는 5천만 NT$(18억 원)이다. 한국에선 소규모영화이지만 대만에선 블록버스터 급이다. 위덕성 감독은 영화사에서 1,500만 NT$를 조달했고, 대만정부(영화를 담당하는 신문처)로부터 제작비의 10%인 500만 NT$(1억 8천 만원)를 지원받았다. 나머지 3,000만 NT$는 모두 위덕성 감독이 집을 저당 잡혀 조달했다. 촬영현장에서 호텔 방(영화에 등장하는 샤토 비치 호텔)을 세 칸 밖에 제공해 주지 않아 감독은 원로 배우들과 일본배우들에게 할당해 주고 나머지 배우와 스태프는 현지의 민가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제작비 아끼느라. 바퀴벌레가 기어다니는 방이었다고 한다. 헝춘에는 극장도 없단다. 영화 성공 이후 마을회관에서 주민 모아놓고 특별상영회를 가졌단다. 위덕성 감독은 이 영화의 일본정서에 대한 논란에 억울해 한다.



위덕생 감독의 대만사 탐구는 이어진다. <하이자오 7번지> 다음에 내놓은 작품은 1930년대 일제치하 대만에서의 항일투쟁을 <ㅣ디그 발레>(원제: 赛德克·巴莱)이다. 대만에도 원주민 부족들이 몇 있는데 타이중 산악 지역에는 시디크(赛德克)족이 살고 있다. 일제 치하 당시 총독부의 압박에 반발하여 항쟁이 일어났고 시디크 부족 사람 8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살아남은 종족은 강제이주 당하기도 했다)  이때 사건을 대만역사에서는 우스사건(雾社事件)이라고 부른다. 그 때의 피비린내 나는 항쟁을 위덕성 감독이 지금 영화에 담은 것이다. 위덕성 감독은 친일(?)논쟁을 일으킨 영화로 제작비를 벌어 독립투사 이야기를 찍은 것이다. 대만역사와 대만영화에 대한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하이자오 7번지>는 지난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2008년)에서 <제 7봉>이란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당시 감독과 주연배우들이 부산을 찾았었다.


영화에서 졸속(?)으로 결성된 동네 밴드에서 리드 보컬 역을 맡은 배우는 범일신(范逸臣,판이천)이다. 원래  가수출신이고 이 작품이 첫 영화출연작이다. 한류영화의 대박상품이었던 전지현 주연의 <엽기적인 그녀> 주제가 의 중문판 노래를 불러 우리나라에도 조금 알려진 가수였다. 영화에서 범일신과 함께 밴드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모두 대만에서는 그럭저럭 잘 알려진 뮤지션들이다. 유튜브를 뒤져보면 이 가수들 노래 감상할 수 있다.

혹시 대만 민초들의 질박한 이야기나, 대만영화의 한 가능성을 엿보고 싶다면 이 영화 <하이자오 7번지>를 추천한다. 물론 역사관에 대한 시비는 필자같이 심각한 사람 몫으로 남겨놓고 말이다. ⓒ박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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