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나라의 가난한 국민
대만에는 금마장 영화시상식이란 게 있다. 홍콩의 금상장과 함께 중국어권에서는 양대 영화제로 손꼽힌다. 근래 들어 두 영화제 모두 중국, 홍콩, 대만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이 경쟁을 벌인다. 대만은 후효현과 양덕창 외에는 뚜렷한 스타급 영화감독이 없는지라 대만에서 열리는 이 영화제가 남 좋은 일만 시킨다는 비아냥거림을 받을 정도로 외지(중국 혹은 홍콩)영화인의 잔치판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대만영화계도 조금씩 자기들 생존방식을 모색하고 있고 해마다 깜짝 놀랄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2008년 <해각7호>(하이자오7번지)라는 초특급 흥행 작품을 만들어내더니 2009년에는 <불능몰유니>라는 작은 작품으로 대만영화계의 만만찮은 생존본능을 보여주고 있다. ‘불능몰유니’(不能沒有你) 중문제목 옆에 ‘No Puedo Vivir Sin Ti’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건 스페인어이다. ‘너 없인 못 살아’라는 의미이다. ‘워낙 소중한 존재라서 만약 네가 내 곁을 떠나버리면 난 삶의 의미를 잃고 더 이상 살 수가 없어..’라는 뜻이다. 바로 대만 까오슝(高雄)의 한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이다.
가난한 아버지, 불쌍한 딸
대만 남부의 항구도시 고웅(까오슝)에서 허드레 잠수부 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이무웅(李武雄)에게는 7살 난 딸아이 장옥정(張玉婷)이 있다. 아버지는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번듯한 직업도 없다. 단지 털털거리는 고물 모터를 모터사이클 뒷자리에 싣고, 딸과 함께 바닷가로 나선다.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바다 속으로 잠수하여 배의 프로펠러를 점검하는 위험한 일을 한다. 가끔 가다 에어펌프의 모터가 말썽을 피워 잠수복으로 연결된 고무호스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이무웅의 생명도 위험할 지경이다. 위험을 감수하며 바다 속에서 일한 대가는 푼돈. 아버지와 딸은 일정한 거처도 없다. 단지 바닷가 창고 한 쪽에 대강 먹고, 자고, 살고 있을 뿐이다. 어느 날 경찰이 찾아오고, 관청(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동사무소)에서 공무원이 찾아온다. 딸이 학교 갈 나이가 되었다고. 이무웅에게는 오래 전 잠시 동거하던 여자가 있었고 그 여자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고, 이무웅은 딸애를 혼자 키우고 있었는데 그 사라진 여자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했단다. 딸아이는 이 오래 전 사라진 동거녀의 딸로만 인정된다. 공무원의 입장에선, 그리고 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무웅에게는 7살 난 여자애를 키울 아무런 법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아버지는 당황할 수밖에. 그나나 그에게 일자리를 봐주던 초등학교 동창이 그에게 충고를 준다. 우리 동창 중에 의원이 있다고. 서울(타이베이)가서 한번 만나보라고. 그래서 아버지는 딸을 데리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타이베이 입법원(국회의사당)을 찾아간다. 다행히 같은 객가인(客家人)이며 동향인 의원은 사정을 알아보겠다고 그런다. 하지만 그런 노력과는 상관없이 복지 관련 부서에서는 원칙대로 딸애를 데려가겠다고 그런다. 법적 관계자도 아니며, 뚜렷한 직업도 없고, 아이의 교육도 책임 못질 아버지 대신, 법적 후견인을 연결시켜주는 것이 복지국가의 당연한 책무이기에. 아버지와 딸은 한 번 더 타이베이를 찾아간다. 이번에는 총통부(대통령 관저)를 찾아가 읍소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총통부에는 이미 다른 시위대가 온갖 격문과 피켓을 들고 시위 중이다. 아무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자 이무웅은 위험한 선택을 한다. 타이베이 최고 번화가 도심지 육교에서 딸애를 껴안고는 뛰어내리겠다고 소리치는 것이다. 곧바로 기자들이 몰려오고 방송사에서 생중계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사회가 불공평하다!”고 소리 지른다. 곧이어 경찰이 덮치고 그 길로 아버지와 딸은 생이별을 한다. 아버지는 쓸쓸히 가오슝으로 돌아오고, 딸은 입양된다. 그리고 얼마간 세월이 흐른다. 오늘도 바다에서 위험한 일을 끝낸 이무웅이 물속에서 나오자 공무원이 딸애를 데리고 와 있다. 아버지는 어렵게 딸애의 소식을 들었었다. 딸애는 그동안 몇 번씩 입양과 파양을 거쳤단다. 학교에서 공부도 곧잘 하지만, 그 딸애는 아버지와 헤어진 뒤 단 한 마디로 말을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딸애는 아버지가 너무나 보고 싶었던 것이다. 입을 꼭 다문 채....
실화와 실제
사회가 불공평하다며 딸애를 꼭 껴안고 육교에서 투신 소동을 벌인 것은 실제 대만에서 있었던 일이다. 2003년 당시 6개의 방송사가 이 장면을 보도했었다고 한다. 이 일을 대만의 영화배우인 대립인(戴立忍)이 영화로 만든 것이다. 그의 두 번째 감독 작품이다. 대립인 감독은 2003년 방송들이, 언론들이 그렇게 대서특필한 사건이지만 그 후속 보도가 전혀 없음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이렇게 영화로 만든 것이란다. 언론의 선정적 보도관행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DNADNA 검사보다도 법조문을 중시하는 관료주의를 고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 대만에서는 이 영화 개봉 이후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가 할 수 있는 복지체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물론, 아직까지 결론은 없다!)
못 배운 아버지, 가진 것 없는 친권자. 그리고 가난의 대물림이 분명한 실제에 대해 국가가 나서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적응을 못하고, “못 살아도 아버지와 같이만 있고 싶다면....” 아마도 가장 쉬운 해결책은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직업과 제대로 된 집을 장만해 주는 것이 최상의 해결책일 것이다. 그 아이는 장난감을 고사하고 TV가 뭔지도, 인터넷이 뭔지도 모르고도 아버지와 단 둘이 행복하게 살았으니 말이다.
대만 영화의 힘
<불능몰유니>는 지난 46회 금마장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2009년 최고대만영화상, 그리고 그날 시상식 관객상까지 합치자면 5개 부문을 석권했다. 이 영화의 제작비는 500만 NT$, 후반 작업 등 포함하면 800만 NT$로 완성되었다. 800만 NT$라고 해봤자 우리 돈 3억 원이 안 들었다는 말이다. 대만 가오슝 지방정부에서 보조금을 조금 받았고, 감독과 배우가 제작비를 내어 완성시킨 것이다. 지금 이 영화는 여기저기 영화제에서 모셔가고 있다. 아마도 수상금액이 제작비보다 많은 영화가 될 듯하다. 이 영화는 이미 내년 2월에 열리는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대만 대표로 뽑힌 상태이다. (한국은 봉준호 감독의 <마더>가 출품되었다)
가끔가다 보는 대만 영화의 배우들은 왠지 어눌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 이무웅 역을 맡은 배우는 특히 더 하다. 이 배우 이름은 진문빈(陳文彬)이다. 배우가 아니다. 원래는 신문기자였고,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아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다. 그러다가 대립인 감독과 뜻이 맞아 돈을 긁어모아 이 영화를 완성시킨 것이다. 딸 역의 조우훤(趙祐萱)도 이 영화가 첫 작품. 감독은 의도적으로 신인을 캐스팅하여 리얼리티를 높인 것이다. 이 영화는 흑백영화이다. 대만의 어두운 사회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이 영화도 한국에서 소개되는 기회가 생겼음 한다.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