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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린 Dec 22. 2023

당연한 것을 당당히 요구하기를

<나의 가치는 내가 정한다>

세상은 가끔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은 세계로 만드는 때가 있다. 사진에 대한 저작권이 불합리하니, 저작권료 지불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월급이나 페이가 밀리면 당당히 요구해야 하는 것처럼. 결과적으로 중단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일을 해온 약간의 인센티브는 언급해야 하듯이. 꼭 비용적으로 뿐만은 아니다. 누군가가 아이디어를 도용하면 저작권 침해로 알려야 하는 것도. 등등 나열하자면 너무 많은 이런 사건들이 이 세상엔 숱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바로잡자는 의미는 아니다. 바로 잡을 수도 없는 노릇임도 분명하다. 적어도 이와 같은 당연한 것에 대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정도를 태도와 마인드로 지니고 있다면 어떨까. 부조리한 세상에 불합리함이 따르는 것은 어쩌면 이치이다. 이것을 이치이기 때문에 묵묵히 넘겨가며 살아야 한다면 자유 의지와 또다시 충돌하게 된다. 어떤 쪽에서든 누구도 피해받을 의무가 없고, 피해를 입힐 권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나온 이야기는 ‘음악보다 사진 및 디자인에 대한 저작권이 불합리하다’였다. 음악으로 먹고살고 있는 나로서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나는 이런 생각을 떠올렸기에. ‘디자인의 객단가에 비해 음악은 왜 이렇게 저렴하지?’ 서로 다른 예술을 종사하고 있는 두 사람의 생각이 비슷한 듯 달랐기에 적잖이 충격이었다. 음악의 객단가를 올리는 것은 실력을 키우고, 브랜딩을 해서 몸값을 올리는 것만이 전부라 생각해 왔다.


여기서 김시현 대표님의 방식은 새로웠다. 당연히 저작권은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에 따른 저작권료를 창작자라도 직접 받아서 권리를 챙겨야 마땅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한 후 바로 당당히 요청하는 모습이 반할 정도로 멋있었다. 음악은 왜 객단가가 낮을까? 그렇다면 음악에 투여되는 시간과 비용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제 값을 받는 게 마땅하려나? 여러 생각을 해보지만, 여전히 답을 찾을 순 없었다. 이에 대해선, 나뿐만 아닌 시현 대표님도 제일 어렵다고 전하고 있다.


대표님의 당연한 논리에 대해 이미 불합리함에 익숙해진 나도 처음엔 의아함을 가졌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었는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당신은 돈을 받고 촬영을 하니 그것은 상업사진이지, 작업이 아니다.”
이에 시현 대표님은 오히려 의문을 품었다.
’ 예술가는 왜 가난한 이미지를 가져야 하고 죽고 난 뒤에야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가 많을까.’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도 이런 선택지에 놓이게 된 적이 있었다. “돈을 벌고 싶다면 상업 음악을 택하고, 너의 예술을 하고 싶다면 예술 음악을 하면 된다.” 당시엔 맞는 말이라 여겼다. 나에게 있어서 차트에 오른 음악들을 하는 작곡가들은 상인이자 판매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예술가라는 인식이 옅었다. 하지만, 정말 그들을 단적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 그게 옳은 방향일까? 내 생각이 한창 어렸다는 결론이 지어졌다.


사실 아직 나의 실력에선 어느 쪽으로든 채워가야 할 게 많다고 느낀다. 어쩌면 이미 채운 걸 놓치지 않기 위해 유지해야 하는 이보다, 채워 갈 일만 남은 희망적인 나의 상황이 더 나을 수도 있다고 바라본다.


나만의 가치를 정립하고, 스스로 인정하며 그에 따른 값을 요구한다는 것 



평생 어려울 숙제가 될 것 같다. 이 글을 보는 독자님들에게도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게 바라보는 세상'에 치어본 적이 있다면, 한 번쯤은 자신의 태도를 가엾게 여겨 자신이 옳다는 믿음을 가져보기를 바란다.









사진은 한번 검색하면 개인 작업이든, 기업과 공동의 작업이든 손쉽게 이미지를 찾아 저장하고 공유할 수 있다. 아직도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미흡하다. 그렇다면 시각 예술가들은 작업을 시작하는 시점에 저작권료를 받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내가 ‘시현하다’를 시작할 때 누군가 “당신은 돈을 받고 촬영을 하니 그것은 상업사진이지, 작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예술가는 왜 가난한 이미지를 가져야 하고, 죽고 난 뒤에야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가 많을까.

여전히 나는 내 작업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이 가치가 얼마인지 정해서 알려야 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 개인 초상을 찍는 나의 작업은 누군가에게 팔지도, 상업적으로 사용하지도 못하는데 “저는 몇 만 원짜리 사진가예요.”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 내 가치는 내가 정한다.’ 참 어렵다. 자신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 판단한다는 것은.

- 최소한에서 최대한으로 시현하다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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