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글(40번째 글, 불변하는 고정된 실체는 없다, 무아!)에서 ‘무아(無我)’를 체득하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괴로움을 해결하려다가 불교를 만났고, 불교의 핵심이 ‘무아’인데, 이 ‘무아’를 이해하고 체득하게 되면 괴로움이 사라진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는 괴롭다고 느낄 때마다 무엇 때문에 그리 괴로웠을까?
가장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해 본다면,
첫째, 이 몸을 ‘나’라고 여겼기에 나에 대해 누가 칭찬하거나 비난하면 기분이 좋아지거나 나빠졌고,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그놈의 인정욕구를 버리지 못해 괴로웠다.
둘째, 올라오는 생각이나 느낌을 내 생각 또는 내 느낌이라고 여겼기에 한 생각이 올라오고 그에 따라 한 느낌이 올라오면 그것에 휘둘리며 살아왔다.
독일 칼프, 헤르만 헤세 동상 그림자와 내 그림자
이 몸이 내가 아니고 올라오는 생각이나 느낌이 내 것이 아니라면, 이 몸을 통해 생명이 살고 있고, 상호의존하는 관계의 원리가 이 몸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것이 짐짓 이해가 된다. 물론 깨달음은 이러한 머릿속의 이해가 가슴까지 내려와야 한다고 하니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지만,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내용들이 이해는 되는 것이다.
생명이 내 몸을 통해 살고 있다면 생명은 전체로서의 생명을 의미할 것이기에, 내 몸으로 살고 있는 생명 그 자체를 아름답게 꽃 피울 수 있도록 내 몸을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므로, 전체로서의 생명인 ‘나’는 두려울 것이 없음을 자각하게 되고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어진다. 미워할 대상이 ‘나’ 바깥에 따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를 하고 있다가도 누군가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저 사람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거야? 자기가 뭔데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고 훈계를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올라온다. 자연스럽게 자기를 방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하고 끝나는 것은 도로아미타불이라는 것이다. 그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공부하고 수행했지만 원점으로 돌아와 있는 것이다.
독일 뤼데스하임의 로렐라이 언덕(옛날부터 전~해오는 쓸쓸한......)
그러나 나는 좌절하지 않으려고 한다. 붓다가 발견한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잘 안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 깨어 있기를, 지금 이 눈앞의 진실을 알아차리기를, 현존하는 시간을 점점 늘려갈 수 있기를 발원하며 유장한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생에 끌고 다니고 있는 이 몸도 사랑해 주려고 한다. 이 몸과 이번 생에 인연 맺은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인연들도 이 몸처럼 사랑하려고 한다. 이번 생이 지나면 다시는 못 만날 인연일 것이기에.
봉하마을, 노무현 대통령님 잠 드신 곳
○ 들숨날숨에 마음챙기는 명상법
1. 눈을 감고 어깨 힘을 빼고 등을 곧게 펴고 손은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내려놓는다.
-> 좌선의 경우이지만, 명상은 행주좌와어묵동정.. 어떤 경우에도 가능하다.
2. 코끝의 숨이 들어가고 나가는 부분에 집중한다.
3. 잡념이 생기면 알아차린 후 다시 들숨날숨으로 돌아간다.
4. 2~3을 반복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진행했던 창령사 오백나한전, 선정에 든 나한
○ 잠깐 멈춤의 미학, 잠깐정지법
우리는 쉴 새 없이 생각하느라 머리를 잠시도 쉴 줄 모르고, 마음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인위적으로라도 잠깐 멈추는 것은 그런 자신을 살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날 때, 식사할 때, 걷다가, 근무하다가 잠깐씩만 모든 동작을 멈추기를 해 보면 멈춰 있는 시간만큼 자기를 돌아보게 되고, 쉴 새 없었던 생각과 마음을 잠시라도 쉬어 볼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2020년 9월 25일에 출간된<여성 직장인으로 살아 내기>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