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엔 직장으로 출근하고, 저녁엔 집으로 출근하는 직장여성들의 삶에 대해 전쟁이 아닌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있을까?
사실, 나는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낳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직장맘들의 고충을 잘 알지 못한다.
5년 3개월간 서울시직장맘지원센터의 팀장으로서 그 많은 직장맘들을 밀착상담•지원했어도 그분들처럼 직접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간접 경험을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신물이 나도록 해보았기 때문에 아주 조금은 여성들의 삶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초등학교 2~3학년 때부터 부엌의 살림이 다 나와 있을 때 홀로 몇 시간 동안 설거지를 해보았고,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생계를 위해 외지로 돈 벌러 나가신 부모님 대신 아침마다 밥을 하고 반찬을 하여 동생들 도시락을 싸놓고 학교에 가는 생활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암 수술하고 병원에 계신 엄마의 병간호를 했었고, 엄마 대신 제사상에 놓을 음식을 장보기부터 만드는 일까지 아빠의 지도하에 직접 하여 제사상을 차렸으며, 김치를 처음 해본 시기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 1년간 재수생활을 했는데, 그때도 동생들 밥 해주면서 집에서 공부를 하였고, 대학생활 상당기간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대학 졸업 직후에는 당시 고3이었던 금쪽같은 5대 독자 남동생 밥을 해주기 위해 1년간 함께 생활했고, 동생의 대학 입학이 결정된 후에는 그 많은 집안 살림을 혼자서 정리하여 아빠 트럭에 짐을 싣고 여러 번 왕복하면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아빠가 목 디스크 수술을 하게 되셨을 때에도 아빠의 병실을 지켰다.
이후 대학시절 찾아낸 길인 공인노무사로 살기 위해 혼자 노동법을 읽으면서 수학교실 강사 등을 하였고, 큰 언니 집과 작은 언니 집에 번갈아 머물기도 하면서 떠돌다가 스물아홉의 강을 건너던 해, 8월 말이 되어서야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해인사 근처 고시원에서 1년, 서울과 남양주의 고시원에서 10개월간 공부를 하여 2004년 11월, 공인노무사 시험에 최종 합격하였다.
나는 고시원 생활 1년 10개월 동안 두 번 빡빡머리를 깎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머리를 깎을 정도였으면 사법시험을 공부했어야 했나 보다 싶다.^^ 물론 합격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지금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시기는 고시원 생활 1년 10개월이었던 것 같다. 그 기간 동안 노무사 공부와 불교공부를 서로 경합하듯이 하였고, 밥 먹고 산책하고 공부만 해도 되는 생활을 하였기에 설거지를 안 해서 좋았다.
공부에 집중했던 1년 10개월과 그 후 5~7년 정도까지의 기간 동안 삼천배를 총 22~23회 하였는데, 특히 일주일간 매일 삼천배를 하기도 하는 등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다.
나는 노무사가 된 후에도 바른 길을 가기 위해 신중하고 어렵게 한 발씩 디뎠고, 한 번 디디면 미친 듯이 열심히 일을 했다. 그렇게 쌓은 경력은 어떤 기관 면접에서 경력이 화려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되었고, 지금은 한 발 물러난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현재, 코로나 19로 5개월째 전 세계가 어리둥절하면서 혼란스럽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나 역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여의는 길을 가겠다는 마음으로, 삶이 나를 오롯이 관통하도록 눈앞을 직시하고, 생각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저 오직 할 뿐인 자세로 단순하게 현존하는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언젠가는 애쓰지 않아도, 살아내지 않아도 저절로 그냥 살게 되는 날이 올 거라 믿지만, 아직까지는 살.아.내.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내 삶의 화두는 세 가지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여성과 노동과 불교.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고통은 노동하는 고통이라 생각했기에, 노무사가 되었고,
노무사로서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가기 위해 참 많이도 애를 썼다.
나는 ‘여성’으로 태어났고,
‘노동’이라는 화두로 인해 공인노무사의 옷을 입었으며,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다가 스승 붓다를 만나게 되었기에, ‘붓다의 가르침'은 내 삶의 나침반이 되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두 달간 홀로 서유럽을 여행했던 일과 전국에 있는 60여 개(해인사는 30회 넘게 갔고, 여러 차례 간 사찰도 꽤 있으니 횟수로는 100회가 훌쩍 넘을 듯) 이상의 사찰에서 템플스테이 등을 했던 일은 내 몸과 마음에 속속 스며들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미소 짓게 하는 힘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가 여성으로, 직장인으로 전쟁 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 순간에도,
심지어 코로나 19로 모두가 고통받고 있는 순간에도
우린 그저 아무 일 없는 듯이 미소 지을 수 있다는 것,
각자가 지닌 아름다운 기억만으로도 우린 그렇게 가끔 웃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류의 고귀한 지혜 중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을 발견한 붓다의 가르침이 있기에
우리는 결국 과거와 미래에 끌려가지 않고 현존하는 삶을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어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그저 호흡에 내 의식을 집중하고, 번뇌가 일어나도 이를 알아차린 후 다시 호흡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참 좋겠다는 것을.
이제 앞으로의 삶은
‘무아’를 어떻게 계속 알아차리고, 삶에서 구현할 것인지,
어떻게 노동하는 삶이 행복하도록 만들 것인지,
어떻게 여성 직장인들이 덜 고단하게, 더 행복하게 살아나갈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성찰하고, 고민하고, 판단한 후, 결론이 나면 이를 실천하는 풍부한 경험들로 수놓아질 것 같다.
그리고 4년간 암투병 끝에 몸의 기능이 멈춘 상태에서 30시간 동안 임사체험을 하고 돌아온 인도 여성인 아니타 무르자니가 말했듯이,
우리의 본질은 순수한 사랑 그 자체이고, 우리 각자가 그저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외엔 할 일이 없으며, 이렇게 되면 자신과 타인을 치유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우리는 모두 각자 전체에서 왔고 전체로 돌아가는 존재들이라는 것,
나는 나의 삶 그 자체라는 것.
하여 마치 영화를 볼 때 스크린을 통해 수많은 영화가 지나갈 수 있지만,
삶은 영화가 상영될 때든 끝난 후에든 스크린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
삶은 자면서 꿈을 꿀 땐 온갖 스토리가 펼쳐지지만,
그 꿈 전체는 내가 만든 세상일 뿐이고, 꿈에서 깨는 순간 사라지는 이치와도 통한다는 것,
그리고 바다에서 파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그 파도는 바다 그 자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