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제2의 고향 해인사, 성철스님의 백련암

나는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시절의 문을 해인사에서 열었다.

by 김명희 노무사



스물아홉의 강을 힘겹게 건너던 2002년 여름, 내가 스무 살이었던 해 늦가을에 입적하신 성철스님의 다비식을 TV로 지켜보면서 그 당시 가슴에 담아두었던 무언가가 갑자기 불쑥 솟아올랐다.


그 길로 뭐에 홀린 듯이 미용실에 가서 빡빡머리를 밀었는데, 그때 헤어디자이너가 정말 깎을 거냐고 몇 번씩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삭발을 시작할 때 머리 가운데를 먼저 쑥 미는데,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기억이 생생하고, 모자를 사서 쓰고 집에 들어갔을 때 엄마가 사색이 된 얼굴로 모자 벗어보라고 소리치던 생각도 난다.



해인사 원당암에서 본 풍경



그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 트럭에 책들과 각종 짐들을 싣고 합천 해인사가 있는 마을인 가야면에 있는, 경상북도 성주와의 경계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시원에 들어갔다.


고시원에서 밥 먹고 산책하고 공부하는 생활에 적응하는 것은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방안에 혼자 앉아서 책을 펴면 지나간 삶에 대한 온갖 상념이 올라왔고, 자기 연민에 빠져 펑펑 울던 밤들도 있었으며, 경상남북도를 가르는 경계선까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산책(왕복 40~50분 걸림)을 다녀왔다.


공부를 하려고 하면, 꼭 그때마다 수험서가 아닌 다른 책들이 읽고 싶어졌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노무사 공부는 제쳐두고 읽고 싶었던 책을 읽으면서 지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읽었던 책들이 그 이전까지 읽었던 책들보다 더 많았던 것 같고, 그 책들의 내용이 온몸과 마음에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스며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6~7개월이 지나면서 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한 방 맞은 것처럼 조바심이 들었고, 제대로 공부를 해온 것인지 걱정이 되었으며, 노무사 공부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지 않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바로 해인사 백련암으로 찾아갔다.



해인사 일주문에서 천왕문 사이 아름다운 길



이전에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해인사를 다녀왔고, 비구니 스님들 계시는 청도 운문사에 다녀오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성철스님 살아계실 때 통과의례이기도 했다는 삼천배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예불 도중 해야 하는 절은 해봤지만, 108배를 하는 방법조차 모르고 있었고, 백련암에서는 백팔대참회문을 보면서 하라고 했지만, 그 당시의 내겐 그런 방식이 익숙하지 않아 하나부터 삼천까지 세면서 절을 했다. 혹시 잘못 셀까 봐 100배를 할 때마다 성냥개비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하나씩 옮기며 30개가 다 옮겨질 때까지 했다. 조금이라도 적게 하게 될까 봐 넉넉하게 더 얹어가면서 했다.


저녁 7시 정도부터 절을 하기 시작했는데, 밤새 절을 하다가 새벽예불 시간이 되어 예불이 시작되자 그때부터는 다리가 후들거려 굽히는 것이 너무 힘들었고, 이러다가 다리가 부러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왔고, 아침 7시가 되기 전에 절을 마치게 되었다. 약 12시간 동안의 대장정이었다.



해인사 새벽예불 법고 치고 계신 스님



당시의 백련암 원주스님과 독대를 하면서 법명을 받았는데, 두원인(斗圓忍)이었다. 성철스님께서 법명 짓는 법을 알려주신 대로 지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불기자심(不欺自心)’이라고 성철스님께서 직접 쓰신 글씨를 받았다. 첫 삼천배를 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두원인과 불기자심을 화두 삼아 공부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원주스님 지시로 백련암에서 공부하고 있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어떤 스님께서 나를 고시원까지 차로 데려다주셨다.

그때 그 스님께서 “마음이 편안하죠?”하고 물으시더니, “백련암에서 삼천배하고 간 수험생들은 모두 시험에 합격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실제 그 이후로 머리가 맑아지면서 잘 읽히지 않았던 과목이 술술 읽히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해인사의 내 사유공간



그 시절, 해인사와 인연을 맺지 않았다면 내가 공인노무사의 옷을 입을 수 있었을까? 아니, 붓다를 제대로 만날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해인사는 내게 특별한 곳이다.


나는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시절의 문을 해인사에서 열었고, 우리나라의 그 많은 사찰 중 최소 30회 이상 간 곳은 해인사뿐이기에 지금도 제2의 고향처럼 해인사를 종종 그리워한다.


아마 올해도 어느 날 문득, 훌쩍 해인사를 다녀오게 될 것 같다.

그래, 지금이야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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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구광루와 해인도가 그려진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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