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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강변에서 홀로 부처를 만나다/ 노동법률 이야기(3)

빈 강변에서 홀로 부처를 만나야 하리라! 노동법률 이야기는 자료 업로드~

by 김명희 노무사

붓다의 가르침을 관념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은 '빈 강변에서 홀로 부처를 만나야만', 그때서야 비로소 진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


"고요한 소리"에서 펴낸 작은 책 시리즈는 불교공부, 아니 마음공부를 진지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적극적으로 소지하고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다.


일단 방대한 팔만대장경은 엄두 자체가 안 나고, 빨리어로 쓰인 것을 초기불전연구원에서 번역한 "4부 니까야"(디가니까야 3권, 앙굿따라니까야 6권, 상윳따니까야 6권, 맛지마니까야 4권)는 각 권 모두 너무 두꺼워 읽기가 겁이 난다. 물론 가끔 일부를 찾아서 읽어보게 되나, 아... 아... 언제 다 읽는단 말인가?


이럴 때 "고요한 소리"의 작은 책들은 주제별로 한 권씩 읽어버릴 수 있는 분량이어서 진도를 쭉쭉 나가는 기분이 드니 참으로 좋고, 음미하면서 읽을 여유마저 생긴다.


이 책, <빈 강변에서 홀로 부처를 만나다>는 레너드 프라이스가 썼고, 우철환님이 옮겼다.

레너드 프라이스의 소개글을 보자.


켄터키 주 루이즈빌에서 태어나 다트머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고, 배우이자 작가로 활동하였다.

1987년 태국에서 출가하여 '나나소봐노'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 책은 4개의 주제로 기술되어 있다.


근본주의 불교

미끼 달린 낚싯바늘

빈 강변에서 홀로 부처를 만나다

사월과 십일월


아, 요즘 나는 빈 강변에서 홀로 부처를 만나는 순간을 맞이하려면 진정 솔직한 자세로 '내 꼬락서니'를 마주해야 한다고, 남은 날이 그리 많지 않다고 종종 느끼고 있다. 절박한 심정이 올라오곤 하는 것이다.

불교공부를 고급취미 수준으로 여기다가는 이 "업"의 윤회를 거스를 수 없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짓는 삼업의 윤회를 그치려면 진짜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것!


이제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근본주의 불교


모든 부처님들은 다만 길을 가리켜 주실 뿐이다. 그 길은 계정혜의 완성을 통해 고(苦)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매우 어려운 길이다. 그것은 실천도이다. 길이란 것은 그 길을 따라가려는 의지가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고, 아무리 의도가 좋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공허할 따름이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정신적 오염원을 완전히 말려버려야 하고, 우리가 매여 살던 낡은 환상들은 산산이 부숴버려야 하며, 마음은 빛을 찾아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철저히 근본적인 길이다. 부처님들은 우리들에게 앞에 있는 것도 버리고, 뒤에 있는 것도 버리고, 또 그 중간에 있는 것도 버리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버릴 때, 그때만이 생사윤회의 바퀴는 축에서 튕겨 나갈 것이다.


부처님의 근본적인 관점에서 보면, 윤회란 우주의 회전목마를 타고 희희낙락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고통의 반복 순환 가운데로 중생들을 끌고 다니는 무서운 생사의 불가항력 그 자체이다.


"너 자신을 해방시켜라!"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모든 삶과 사건들이 '고'라는 주제의 변주곡이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 지속성도, 영구성도 없다. 공허하고 또 공허할 뿐인 허망의 그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아'라는 것, 너나없이 모두가 그토록 많은 시간을 바쳐 지키고 키우는 그 자아란 순전히 허구다.

"그것을 놓으라!"라고 부처님은 이르신다.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 주지 않는다.

바라는 대로 된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노릇이다.

불제자는 세상에 그만 집착하고 고를 끝내는 길을 밟아나가야 한다.

문제의 근원은 갈애이고 그 근본적 해결은 지혜를 통해 갈애를 부수어버리는 데 있다.


부처님은 상대가 알아듣고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이 어느 정도인가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가르치셨다.

궁극의 종점은 누구에게나 똑같겠지만 그 길을 나아가는 정도는 각자의 근기에 달렸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늘 명심해야 한다.

진리를 갈구하면서도 밥은 제쳐두고 차림표만 먹어대는 주지주의에는 안전함(적정처)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의 본질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덧없고 비참하고 허망한 현상들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짓거리를 멈추는 데 있다.





미끼 달린 낚싯바늘


부처님은 가르치신다.

쾌락과 고통이 한 덩어리가 되어 끔찍하게 구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그들을 억지로 갈라놓으려 무모한 노력을 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오염덩이 전체를 초연하게 멀찍이 바라보는 데 있다고.

모든 현상은 한결같이 덧없음(무상), 만족스럽지 못함(고), 실체가 없음(무아)이라는 특성을 공유하는 만큼, 어떤 것은 마음에 든다, 어떤 것은 싫다고 가려내는 일은 소용없는 짓이다.

사물을 좋고 싫고의 관점에서 보는 마음가짐은 버리고, 대신 '마음챙김'이라 불리는 초연한 관찰이 그 자리를 메꾸도록 해야 한다.

미끼에 낚싯바늘이 숨겨져 있는 한 식욕을 누르는 길 말고 어떤 더 좋은 방법이 있겠는가.




지혜는 결단코 마음의 때와 양립하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들과 타협하려 든다는 것은 바로 부처님이 설하신 실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표시인 것이다.

머리로는 갈애와 집착이 고로 이끌어간다고 인정하지만 아직 꿰뚫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를 말로만 이해할 뿐 직접 체험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명한 불자는..

보이는 외양이 어떠하든 간에 그것을 마음챙겨 주시할 뿐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다가오는 대로 생을 소박하게 즐긴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거듭거듭 마음챙김을 유지하라고 권유하신다.

세상은 탐, 진, 치로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란 쟁취되는 것이지 결코 부주의하여 마음을 챙기지 못한 채 빼앗기고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자유를 성취하여 누리는 사람이란 바로 마음챙김, 정진력, 그리고 장미에서 해독(번뇌)을 볼 용기를 지닌 사람일 것이다.




빈 강변에서 홀로 부처를 만나다


쉽게 믿는 경신(輕信)과 허약한 낙관주의가 우리 삶의 어두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믿기를 잘한다고 해서 회의적이 아닌 것은 아니다.

우리는 쉽사리 믿는다.

그러나 그만큼이나 곧 싫증을 낸다.

오늘의 우상을 쓰러뜨리는가 하면 그 부서진 조각을 가지고 내일의 우상을 열심히 조립한다.

우리는 의심이라는 강기슭을 오르락내리락한다.

서로를 격려하는 고함소리는 점점 더 높아지지만 막상 강물에 발을 담가 보니 물이 찬 것이다.

이내 저 아래쪽에 건너기 더 좋은 곳이 있다고 재빨리 결론 내리고 발을 빼버린다.


강물은 언제나 차가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누군가 지평선 너머로 어떤 환상을 보았다 하면 그 차가움에 잔뜩 움츠러든 우리들은 '이' 장소에서 더 이상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여기 홀로 머물며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기를 거듭해야만 우리의 변덕을 비로소 알아차리게 될 것이며 회한의 심정에서 자문할 것이다.

'늘 이랬단 말인가?'하고.

우리가 불자라면 '그렇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실망하고, 다시 비틀거리고 주저하며 회오(悔悟)하기를 되풀이하며 끝없이 버둥거려 온 풍경화를 두고 윤회라 부른다.


우리의 쾌락추구, 또는 '자아실현'이라는 것의 추구 역시 절망으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다.


불교는 바로 버림의 종교이다.

옳지 못한 생각, 옳지 못한 말, 그리고 옳지 못한 행동의 버림 말이다.

우리가 조잡하기 짝이 없는 환상들을, 그리고 마음속의 잡다한 도피처를 버릴 때 우리는 발가벗은 자신을 찾게 되고 비로소 일그러지지 않게 세상을 볼 준비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까지는 무상, 고, 무아의 진실을 말로만 받아들였던 반면, 이제 겨우 우리는 이들 진리를 똑바로 인식하고, 우리가 당면한 곤경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별생각 없이 항상 듣던 '부처님들은 길을 가리켜 주실 뿐이다.'라는 말이 그제야 참신한 의미로 우리의 가슴에 와닿을 것이다.

불교는 스스로를 도울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 우리가 그처럼이나, 그토록 번번이 헤매어 온 그 길고 텅 빈 이곳 강변에서 마침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경신은 믿음이 아니며, 회의주의는 지혜가 아니다.

부처님의 성스러운 제자는 세상사 다가오는 대로 깊이 숙고하면서 해로운 것은 피하고 유익한 것은 받아들이는 가운데 균형 잡힌 마음을 결코 흩트리지 않는다. 누구도 자기를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스스로 법의 뗏목을 타고 윤회의 강을 건너간다. 그 사람들이 여느 사람들과 구별되는 점은 반드시 머리가 명석해서가 아니라 소박하고 단순한 견딜성, 설령 시간이 더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진실된 경로를 밟아나가겠다는 각오가 서있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우리도 진리를 확실히 하면 얼마든지 그들처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는 일은 부서져 가는, 어차피 망가지고 말 장난감을 놓아버리고 홀로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포기의 긴 강변으로 내려서는 일이다. 그 상쾌한 고독에서 부처님을 뵐 수 있을 것이다. 몸은 지혜이고 얼굴은 자비이고 손은 길을 가리키는, 우리 마음속 깊숙이 숨겨진 청정을 똑바로 가리키고 계시는 부처님 그분을.





사월과 십일월


우리는 그저 숨만 쉬고 있으면 된다.

우리는 다만 감관을 제어하며 청정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도록 하자.

괴로워할 것도 전전반측할 것도 없다.

겨울을 탓할 것도 봄을 찬미할 것도 없다.

우리와는 무관한 저들의 오고 감이 아닌가.

죽은 풀잎, 잠자리, 뇌우, 눈......

그 모두 제 갈 데로 흘러가고 있는데 특히 그중에 어느 장면이 좋으니 궂으니 하고 있을 일이 아니잖는가?

실재는 지적으로 파악되는 게 아니다.

마음이 집착 놀음을 그만두면 저절로 드러난다.

놓아버리는 사람이 길 위에 확고히 선 사람이다.

그 사람은 모든 계절을 실속 있게 누리고 살지만, 그 어느 계절에도 매이질 않는다.





'오온의 가합상태'로 '나'라고 이름 붙여진 이 "나"가 진정 자유로워지는 길은 무엇일까?

그건 연기적으로 존재하여 무상하고 실체가 없음을 제대로 꿰뚫어 보는 일이다.

진정으로 보았다면 놓을 수 있으리라.

놓았을 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도 펄펄 살아 숨 쉬는 상태가 되지 않을까?


<싯다르타>를 쓴 헤세의 그 강물을 바라보며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빈 강변에 설 수 있을까?


그런 순간이 오기를!








제20강 : 노동법률 이야기(3)

-> 참고할 주요 자료 업로드


노동법률 이야기(3)는 고용노동부, 서남권직장맘지원센터에서 발간한 개별적 근로관계, 집단적 노사관계, 모성보호와 일생활균형, 직장 내 성희롱과 괴롭힘 관련 자료를 업로드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이 자료들은 노동현장에서 노사 모두에게 매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니, 다운 받아 요긴하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1. 고용노동부 발간 자료


1) 노동관계법 준수 자가진단표


2) 연차유급휴가청구권, 수당, 근로수당과 관련된 지침


3) 집단적 노사관계 업무 매뉴얼


4) 통상임금 노사지도 지침


5) 직장 내 성희롱 예방대응 매뉴얼


6) 직장 내 괴롭힘 판단 및 예방대응 매뉴얼


7) 모성보호와 일가정 양립 지원 업무편람



2. 서울특별시서남권직장맘지원센터 발간 자료


1) 임신 출산 육아기 노동법 안내서


2) 임신 출산 육아기 노동법 활용서


3) 임신 출산 육아기 노동법률 사업장 체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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