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이야기하려다 슬픔의 뒤안길을 만나다.. 노동법률 이야기의 마지막~
<슬픔의 뒤안길서 만나는 기쁨>의 부제는 "'당하는 죽음'과 '챙기는 죽음'에 관하여"이다.
우리는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기에 이를 당하는 죽음으로 표현한 것 같아 얼른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이 책의 저자는 아이야 메다난디 스님이고, 강대자행님과 김용호님이 옮겼다.
저자의 소개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캐나다 태생의 비구니 아이야 메다난디는 18년전(이 책의 발간일이 2004년 11월 15일이니, 1986년) 미얀마 사원에서 떼라바다 전통의 수행생활을 시작했으며 후에 영국 아마라바티 승원에서 비구니 교단에 입단했다. 현재는 독거수행에 전념하고 있다.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슬픔의 뒤안길서 만나는 기쁨
2. 두려움을 넘어선 길
3. 옮긴이의 말
이제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끊임없이 우리는 몸뚱이가 곧 자기려니 한다.
"'나'란 바로 몸뚱이야. 이 생각이야. 이 느낌들이야. 이 욕망들이야. 내가 소유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소유물들이야. 이 인격이야."라고 생각한다.
잘못의 시작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가 이처럼 진리에 무지하다 보니 미혹에 갇혀 살면서 헛그림자만 좇느라 막상 인생이 몰고 오는 폭풍을 정면으로 맞서 보지도 못한다.
우리는 평생 내내 단 한 번 앓아누운 적이 없다 해도 역시 죽는다.
몸뚱이란 으레 그렇게 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죽음이 닥치기도 전에 죽음맞이부터 논하는 것은 결코, 고통을 모면할 길을 자살 따위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얘기는 오히려, 우리의 참된 본성을 알기 위해 이 수행법, 이 통찰의 방법을 이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선 수행을 통해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 몸과 마음의 진면목을 조사하고, 무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그런 다음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죽는 것은 무엇일까? 누가 죽는가?
우리는 '나'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깊이 살펴봄으로써, 죽음에 대비할 수 있게 된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때가 오면, 낙엽이 으레 그러하듯이, 펄럭이며 떨어지는 낙엽처럼, 완전히 열린 마음으로 깨어 있는 의식으로 죽음을 맞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더 많은 재산을 모으고, 갈수록 더 많은 자물쇠를 문에 채우고, 경보장치를 설치하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는 재산을 더 늘리고, 지배력을 더 키우고, 대학 졸업장과 박사학위로 자기 잘났다는 기분을 더 많이 느낄 수 있게 만듦으로써, 서로에 대해 끊임없이 무장을 하고 있다. 남들과의 괴리감을 더욱더 키우면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물에 집착하고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채우고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탓으로 결국 맛보게 되는 것은 더욱더 커져가는 공복감과 고(苦) 일뿐이다. 누구든 갑자기 병에 걸릴 때, 다리를 잃거나 중풍으로 쓰러지거나 죽음을 선고받거나 에이즈에 걸리거나 형언 못할 고통을 겪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우리의 피난처는 어디인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시기 전 아직 싯다르타 왕자로 계실 때, 그분은 모든 것을 갖추고 계셨다. 속세의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숨이 멎는 순간까지, 죽음을 뒤로 미루면서, 즉 자신이 죽어야 할 운명임을 알면서도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속에서 끝내 밀어내면서까지 추구하고들 있는 그 모든 것을 싯다르타 왕자는 이미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왕자는 결국 천상에서 온 네 사람의 사자와 마주친 것이다. (비유적 표현으로 봄)
첫 번째 사자는 힘없고 쇠잔한 노인: 늙음
두 번째 사자는 어떤 병자: 병듦
세 번째 사자는 화장터 장작더미 위에서 구더기와 파리 떼가 우글대는 가운데 썩어 가는 시체: 죽음
네 번째 사자는 한 사문: 진리를 자기 내면에서 찾기 위해 세상을 버린 사람, 극기의 상징인 탁발 수행자
우리 마음은 깨달음까지의 사이에 하나의 심연, 거대한 틈새를 만들어 낸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간격을 건너게 해 줄 것인가?
마음에 느껴지는 이 암흑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 것인가?
그 어떤 것에도 끌리지 않고 등 돌리지도 않는 숭고한 평온과 순수 그 자체인 사랑을 구현할 만한 통찰력을 어떻게 계발할 것인가?
순수한 깨달음과 마음챙김, 지혜로운 반성을 통해 가슴 깊숙이 들어가 우리 존재의 중심에까지 다다라 모든 삶의 슬픔과 고통을 하나의 자애로운 포옹 속에 품어 안을 수는 없는 것일까?
만일 우리가 현상을 꿰뚫는 지혜로 좀 더 명료하게 보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아픔과 고통 사이의 차이점을 알게 될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마지막 임종을 맞으시며 괴롭게 숨을 몰아 쉬셨고 이미 체액이 부패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깊은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셨다. 확실하게 나를 알아보는 눈길이 나의 시선과 만났다. 지난 십 여 년간 치매로 인해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던 어머니는 그 순간 치매의 깊은 어두움을 벗어나 완전한 의식을 되찾으셨다.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찬란한 기쁨이 담긴 웃음을 머금은 채.
어머니와 나 두 사람은 환히 얼굴을 빛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분은 숨을 거두셨다.
그처럼 여러 해 동안 우리에게서 그분을 앗아갔던 그 병은 어디로 갔을까?
그 순간 그 자리엔 색즉시공, 곧 모든 형태는 실체가 없다는 진리의 실현만이 있었다.
그분은 결코 몸뚱이가 아니었다.
거기에 치매가 존재하지 않았고 그분이 죽음을 맞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다만 가슴으로만 알 수 있는 무상이 있었고 사대들이 서로 흩어지며 제각기 환귀본처(還歸本處)하는 분해 과정이 있을 뿐이었다.
경험 세계를 초월하여 사물의 실재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될 때, 그래서 몸을 몸 그대로 알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각성에 도달한다. 우리는 순수한 바른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고 불사(不死)에 닿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인간관계나 가족관계에 있어 지혜를 피난처로 삼을 수 있게 된다. 그 말은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슬퍼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머니, 아버지, 아이들, 가까운 친구라는 기존의 인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을 어떤 사람이라 여기는 그 생각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의 행복이 그들의 사랑에 달려 있다거나, 그들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죽지 않으리라고 보는 견해에 달려 있지도 않다는 뜻이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리듬에, 자연의 법칙에, 생로병사라는 법(다르마)에 스스로를 내맡길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느낌들을 느낌 그대로 느끼고, 아픔을 아픔 그대로 당하면서도, 동시에 사물의 존재방식에 대한 진리를 인식한다고 해서 서로 조화롭지 못할 것은 없다. 아픔은 아픔이요 슬픔은 슬픔이요 잃음은 잃음이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다. 괴로움이란 우리가 그것들 위해 덧붙이는 무엇이다.
"나는 그렇지 못해!"라고 그것을 밀어내면서 덧붙이는 무엇, 그것이 괴로움이다.
그러므로 아픔과 괴로움 사이의 차이점은 바로 자유와 속박 간의 차이와 같다.
우리가 아픔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 아픔을 받아들이고 조사해 보고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슬퍼하고 화내고 놀라고 외로워하는 일이 제대로 안 되면,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을 들여다보는 일도 제대로 되지 않고, 그것을 가슴속에 끌어안고 그것들과 화해하는 일도 제대로 될 수 없다.
응당 느껴져야 할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삶에 저항하거나 삶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한다면, 우리는 노예 상태가 된다. 우리가 집착하는 곳이 바로, 괴로움을 겪는 곳이다.
그러나 맨 아픔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느낀다면, 우리의 괴로움은 죽어 버린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죽음은 바로 그런 죽음이다.
무지로 인하여, 즉 담마를 볼 능력이 없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능력이 없음으로 해서, 우리는 수많은 감옥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깨어 있지 못하고, 스스로에 대해 진정한 자애를 느끼지 못하며,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할 능력조차 지니고 있지 못하다. 가장 깊은 상처에 우리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면, 무지와 이기심과 욕심과 미움이 만들어낸 심연을 건너지 못하면, 그러면 우리는 남을 사랑할 수 없고, 우리의 진정한 잠재력을 구현할 수도 없다. 우리는 여전히 금생사(今生事)를 끝내지 못하게 된다.
자기가 느낀 느낌들에 대해 책임을 짐으로써, 또 행동과 말에 책임을 짐으로써, 자유(해탈)로 가는 길의 토대를 닦게 된다. 우리는 선한 행위가 나 자신과 남에게 가져올 결과를 알고 있다. 인정머리 없이 말하거나 행동할 때, 부정직하고 교활하고 비판적이고 노기등등할 때, 정말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그런 정신 자세, 그런 마음의 태도가 남긴 찌꺼기가 우리 내면 어딘가에 남는 탓이다.
그 찌꺼기를 풀어 없애기 위해, 그 찌꺼기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풀려 나오기 위해선 우리는 그것들을 멀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짝 다가서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결함들에 대해 눈을 뜨고, 우리의 인간성과 욕망과 한계들을 인정하고 몽땅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 어느 누구도 몸으로나 말로, 심지어는 생각으로도 해치지 않겠다는 의도를 키워나가야 한다. 그런데 만일 또 해치는 행위를 했다면, 바른 의도를 회복하여 자신을 용서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는 업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우리는 정신 차려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꼭 특별 정진 기간이 아니더라도 순간순간 자애와 지혜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있다.
명상은 때가 따로 없다. 명상은 우리의 참다운 본성에 합일해 들어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조건 지어진 성품을 초월하는 가운데 조건 없는 상태의 실현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하여 모든 조건을 받아들일 수 있고, 있는 그대로의 모든 사물과 완전히 하나 되고 조화를 이루어 흠 없는 평화 속에 머물게 해 주는 지혜를 얻게 된다.
우리 마음속에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한 치만 품고 있어도, 우리의 참다운 본성을 완전히 구현하기 어렵다. 해탈을 이룰 수 없다.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 수행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자신이 행한 덕스럽고 선한 행동들을 되새겨봄으로써 책임 있게 행동하게 되며, 이는 매 순간 수행을 받쳐 주는 버팀대가 된다. 이때에 마음챙김과 신념과 신뢰에서 나오는 추진력과 순수한 마음의 에너지가 느껴지게 되며, 그 힘이 우리로 하여금 수행을 계속하도록 도와준다.
(부처님께서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셨을 때 마하 카사빠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는 선종의 화두 설명)
꽃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꽃을 통해 우리는 조건으로 생겨난 형태들의 무상성을 본다.
아름다움과 시듦의 본질을 본다.
우리는 꽃의 '그러함(여여)'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경험의 비어 있음, 즉 공성을 본다.
모든 가르침이 그 꽃 안에 담겨 있다.
고에 관한 가르침과 고의 소멸로 이르는 길에 대한 가르침, 즉 고와 고 없음에 관한 가르침들이 담겨 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그 가르침을 시시각각 올바로 알아차려(正知) 삶의 현장으로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마치 부처님께서 우리 앞에서 꽃을 들어 보여 주심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왜 그렇게 무서워할까?
그것은 우리가 아직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진정한 자연을 법의 짜임새에 따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가 없는 상태(고의 멸)가 있다는 것을 아직 이해 못 한 것이다.
태어남이 있을 때 죽음이 있다. 태어나지 않음이 있을 때 죽음이 없음이 있다.
"태어나지 않은, 유(有)에 들지 않는, 조건 지어지지 않은, 최상의, 장엄한 열반"이 있는 것이다.
고통에 빠지면 우리의 마음이 타지만, 정작 마음을 챙기기만 하면, 우리는 그 고통을 고통이 끝날 때까지 계속 태워버리는 데 쓸 수 있다. 그것은 부정적인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숭고한 일이다. 일어 남직한 가지각색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길이다.
그것은 유쾌하고 즐거운 것에만 매달려 불쾌한 경험을 떨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깨달음을 터득했기에, 지혜로워졌기에 가능한 것이다. 여전히 아픔도 느끼고 병에도 걸리고 죽기도 하겠지만,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독한 두려움이나 상처받기 쉬운 약점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을 때, 용기를 가지고 열린 마음으로 미지의 세계에 한 걸음 들어설 수 있을 때, 인간계를 거쳐 자기완성의 확립에 이르는 이 험난한 코스의 신비에 접근하게 된다.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에 손을 대고 그것을 변형시키고, 그것이 비어 있음(공성)을 보게 된다. 그것이 비어 있기에 그 속에서 모든 것이 살 수 있고 또 모든 것이 결실을 맺는다. 이 성취의 순간에 우리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열반은 저 바깥 미래에 있지 않다. 우리는 미래도 놓아 버리고 과거도 놓아 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의 의무나 할 일을 잊는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직업이 있고 치러야 할 일정이 있고 돌보아야 할 가족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행하는 하나하나의 일에 바짝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한다. 삶이 우리에게 다가오도록 놓아두고 밀쳐내지 않는다. 정신적 감정적 습관들에, 그리고 욕망에 묶이지 말고 사물을 존재방식 그대로 관조하고 이해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만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되도록 한다.
우리가 극도로 치열한 감정이나 말로 못할 상실이나 죽음을 당할 때, 승복하고 화해하며 투명하고 흔들림 없이 그것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그 해방 속에 찬란함이 있다.
우리는 세상의 빛처럼 되며, 우리의 삶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축복이 될 수 있다.
시인 루미는 말한다.
"귀금속을 숨겨 두기에 가장 안전한 장소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으슥한 곳이다. 누가 보물을 훤히 보이는 데다 감추겠는가?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기쁨은 슬픔의 뒤안길에 숨겨져 있다.'"고.
아들을 잃고 통곡하는 현자 마르빠...
어린 자식을 잃은 뼈저린 슬픔이 그의 지혜를 퇴전시켰던가?
아니면 그것은 한 위대한 인간, 위대한 현자가 자기 존재와 인간됨의 전체성을 표현한 지고의 겸양이었을까?
모든 조건 지어진 존재들의 피할 수 없는 무상성을 깊이 이해하는 가운데, 아들을 잃은 한 아버지의 자연스러운 슬픔 또한 남김없이 느끼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바라건대, 나는 여러분 모두 부단히 마음공부를 계속하여 두려움을 놓아 버리기를 기원하고 싶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삶에 대한 두려움과 같음을 기억하자.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경험들을 깊이 느끼고 진실로 그 경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기쁨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로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다. 슬퍼할 줄 알면서 또한 사물의 있는 그대로에 대해 기뻐할 수 있다.
나는 최근 아우슈비츠에서 삶을 마친, 한 재기 발랄한 젊은 홀랜드 여성인 에띠 힐레섬의 일기를 읽게 되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그녀는 마음속 간절한 기도의 순간들과 어이없게 산산이 찢겨버린 악전고투의 인생행로를 전하며, 우리 모두가 걷고 있는 이 경이롭기 그지없는 여행, 곧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난을 넘어 시간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으로 통하는 길을 밝히고 있다.
"나는 우리의 파멸을, 비참한 최후를 똑바로 바라보고 나의 삶 속에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죽음이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는 가운데서도 나는 하루하루 성장하기를 계속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의 삶은 죽음에 의해 더 풍만해졌기 때문에......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 슬픔과 기쁨, 내 발에 생긴 물집과 뒤 울 밖의 재스민, 박해, 형언 못할 공포들...... 그것들 모두가 내 안에서 하나이고, 나는 그 모두를 하나의 거대한 전체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감각적 즐거움이란 측면에서 가장 소중하다 싶은 것들을 다 내버리고, 그런 것들의 도움이나 위안도 받지 못하고 깜깜한 밤을 견뎌야만 한다. 또 그 단계가 성취된 다음엔 우리의 생각과 선택들까지도 희생시켜야 하고, 늘 친숙했던 의지처를 빼앗긴 채 더욱 어두운 밤을 겪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일종의 죽음, 곧 챙기는 죽음일지니...... 모든 것들이 걸러져 나가면 그 빈자리는 새로운 현존으로 채워질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은 바로 마음의 연금술을 배우기 위해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나 해로운 일이 아니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자신을 말살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자기를 초월하는 죽음을 배우자는 것이다. 그럴 경우, 죽음은 육체적 종말이 아니라 정신적 초월 과정이 되며, 지금 이 순간 찰나 찰나를 용기 있게 완벽하게 챙겨 가며 삶을 살도록 만들어준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을 초월로 살 때, 우리는 모든 기대와 희망, 모든 두려움과 욕망, 모든 자아 감각과 개인의 과거사 모두를 놓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죽음이야말로 참으로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 사실상의 자기 구원인 것이다.
에띠는 사상 유례없는 최악의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참고 견디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를 학대한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한에 스스로 빠져들도록 놓아두지 않았고, 이 세상에서 고통 외에 바랄 것이라고는 없는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오로지 자기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이었다.
모든 조건 지어진 현상의 진정한 본질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세 가지 보편적 특성을 깨닫는다.
모든 조건들의 일어남 속에서는 아니짜, 곧 무상이 보인다.
이 무상은 죽음의 상을 지니고 있지만, 바로 그 까닭으로 궁극적으로 무상(無常) 내지 무사(無死)를 우리에게 지시해 주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이들 일시적인 모든 조건들은 또한 해체되고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둑카, 곧 욕구의 힘에 내몰리는 고통, 즉 조건 지어진 존재계의 불만족성을 알게 되고 그래서 시간을 초월하는 지혜, 무욕구의 지혜에 도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들 덧없는 조건들이 드디어 끝나면 평화, 비어 있음, 자아를 찾아볼 수 없음, 아나따(무아)가 있다.
언젠가 부처님께서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애통해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아버지를 생각하며 슬퍼하는가? 금생의 아버지인가, 전생의 아버지인가, 아니면 그 전생의 아버지인가? 슬퍼하려면 다른 아버지들을 위해서도 눈물 흘리는 것이 공평하지 않겠는가."(자타까 352)
이 같은 가르침들을 깊이 숙고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죽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망가지는가?
누가 마음 아파하는가?
몸, 느낌, 인식, 정신적 구조물, 생각들, 기억들 가운데 우리 자신이라고 할 만한 것이 무엇인가?
진짜 피난처는 어디인가?
무상한 것들 속에 쉴 곳이 있는가?
우리가 자신을 어떤 욕망이나 조건들과 동일시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곧 죽는 것들에게서 피난처를 찾는 셈이다.
죽지 않을 것들에게 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에겐 두 가지 죽음이 있으니, 하나는 죽음으로 가는 죽음이고, 또 하나는 평화와 깨달음에 이르는 죽음이다.
우리가 마음속에 생각의 부스러기를 잔뜩 끌어안고 다니면서 어찌 짐을 부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망가진 인생이야."
"나는 되게 운 나쁜 사람이야."
"내 친구 중에 에이즈로 죽은 애가 다섯이나 돼. 더 살고 싶은 마음이 안 나."
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스스로 만든 아상을 자기라고 여기고 그 견해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죽음으로 가는 죽음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챙김과 바른 알아차림으로 현재의 매 순간을 맞이할 수 있으면, 그 짐들을 부리기 시작하고, 깨끗이 청산하여, 마침내는 다음 순간을 깨끗한 마음으로 수용할 채비를 하여 이제는 어떤 조건들이 생겨나더라도 그에 집착하지 않고 스러져 가도록 놓아둘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맞이하는 죽음은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은 '경이의 비경을 항해하는 항해자'의 마음이며, 삶을 실제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매 순간을 또렷이 응시하여 놓치지 않으면서, 삶의 소요와 고통과 두려움과 깜깜한 암흑의 생멸을 지켜보며, 그 하나하나를 밝음 쪽으로 돌려 다시 평가되도록 하고 드러나게 하고, 마침내 끝마쳐 사라지도록 한다.
이 수행의 목적은 고통을 쓰다듬어 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 수행은 고통에 대한 우리의 가정에 의문을 던져 보고, 잘못이 있을 때는 도덕적 분개심이 일어나는 대로 놓아두고, 우리의 인간적 성품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병을 앓는 아픔이나, 치욕에서 오는 부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감과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럼에도 자비로운 바른 알아차림의 자세로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생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겨 주든, 우리는 언제나 알아차림이라는 흔들림 없는 한 점으로 돌아올 수 있다. 폭풍 치른 인생 한 복판에 놓여 있는 평온한 거주처이자 안전한 항구인 그 점으로 말이다.
고통받고 애통해하고 미워하고 두려워하며 죽어갈 때, 그런 것들을 억지로 하거나 마음대로 하려 들거나 없애려 애쓰지 않고 자체의 율동대로 가게 놓아둘 때,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원인 따라 일어나는 자연스런 조건들임을 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것들의 본성과 생겨남과 끝남과 끝남에 이르는 길을 안다. 이리하여 죽음은 어둡고 두려운 무엇이라기보다는, 마치 '연꽃을 깨어나게 하는 햇빛처럼' 일종의 부활이요 내면의 밝힘인 것이다.
우리가 하는 수행은 자신이 느끼고 있는 엄청난 불행과 두려움과 죽음을 없애고자 하는 일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환상과 가정들을 버림으로써, 우리 자신을 순간에 맡김으로써, 그리고 어떤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매달리지 않는 용기로 세상 끝 벼랑에 섬으로써,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서의 영원성인가...?)
우리는 죽어야 할 운명을 통해 사랑을 배운다.
가장 희망 없는 고통을 통해 고통의 뒤안길로 넘어갈 수 있다.
자신의 소멸 앞에 그대로 노출될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불멸의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
가장 두려운 상황 한가운데서도 매 순간 신뢰함으로써, 우리는 완벽한 신뢰감으로 살아갈 가능성을 우리 안에서 일깨울 수 있다.
우리가 슬픔 속에 숨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슬픔 앞에 노출되는 일도 더 많아지겠지만 동시에 점점 더 대담해질 것이다.
우리는 사는 법을 배우고 죽는 법을 배우고 기쁨과 아픔을 끌어안는 법을 배우게 된다.
흙이 되자!
공기가 되고, 불이 되고, 물이 되고, 원소가 되자!
지혜의 진주를 찾아 자기 마음속으로 뛰어드는 신비의 항해자가 되자!
그렇게 되면 그때 그대들의 행동은 눈 뜬 알아차림에서 나오게 되고, 모든 순간순간은 그다음을 조건 짓는 청정한 바라봄의 순간이 될 것이다.
이처럼 순수한 시선은 마음속 번뇌를 알아볼 수 있고, 우리를 고통으로 몰고 가는 슬픔을 알아보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있는 존귀한 그것을 알아보게 되고 거기에 전적으로 몸 바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는 순례의 길이다.
여러분 자신을 해방시키고, 세상을 복되게 하기 위해 현재의 그 열성과 전적인 헌신을 계속 견지하라.
에띠가 썼듯이,
"그대는 슬픔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슬픔이 그대를 뭉개 없앨 듯 보일 때라도, 그대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인간은 그만큼 강한 존재며, 슬픔은 그대의 완성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인 것이다. 슬픔으로부터 달아나서는 안 된다. 미움으로 슬픔을 덜려고 하지 말라. 슬픔이 마땅히 차지해야 할 만큼의 공간과 쉴 곳을 그대 내면 속에 마련해 주라.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정직하고 용기 있게 비탄을 견딘다면, 지금 세상을 채우고 있는 이 슬픔도 필시 머리를 숙이고 말 터이기에."
-> 고통의 극점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처절한 아픔은 육체적 별리에서 오는 것만도 아니다.
때로 온 마음을 기울이고 생명을 걸고 믿어 온 이념이 허구임이 드러날 때, 진심으로 존경했던 인격의 이면에 용서할 수 없는 위선이 밝혀질 때, 굳게 맹세한 사랑의 약속이 냉소적인 짧은 몇 마디를 끝으로 없던 일로 돌려질 때 우리는 절망의 나락으로 걷잡을 수 없이 굴러 떨어진다.
그 절망의 강도는 자연히 그동안 바쳐 온 존경과 사랑의 순도에 비례한다.
최고의 순수성을 간직했던 인간관계라면 절망 역시 최고의 강도로 강타해 올 것이며, 추락하는 속도와 강도만큼 고통은 어마어마한 것일 것이다. 또 그 여진 역시 엄청난 파장일 것이다.
이때 생각을 돌려,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을 다시 받아들이고 보면, 어쩐지 이 진하디 진한 슬픔과 고통들이 마치 친근한 벗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을 수 있다. 왠지 이제 허망한 웃음소리보다는 차분한 한숨 소리가 더 진심인 듯 느껴지면서.
도저히 참아낼 것 같지 않던 고통 속에서 문득 용기가 솟아나 되려 희열 같은 느낌이 엄습할 수도 있는 것이다. 슬픔은 어찌 보면 누적된 업을 깨고 올라오는 정신적 용암이며 슬픔이 펌프질해 낸 눈물은 그 질료를 녹여주는 카타르시스의 용액인지도 모른다. 진하기 그지없는 슬픔의 맛은 달콤한 유쾌함만을 맛보아 온 혀끝에선 도저히 느껴볼 수 없던 서늘한 진정제가 될 수도 있기에.
그런 의미에서 비구니 아이야 메다난디의 짧은 글은 순수하고 정확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부끄러운 유태인 학살 피해자의 가족으로서, 그 경험을 놓고 극단적 슬픔의 예, 가장 잔인한 죽음의 과정을 극복한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그 어떤 죽음이든 죽음으로 인한 별리든 비통하지 않은 경우가 없겠지만, 20세기 전반 유태인의 학살극 같은 비극은 찾기 힘든 것 아닐까.
바로 그 형언 못할 공포와 고통의 과정을 정념과 정지라는 무형의 방편에 의지해 정면 돌파하고 오히려 환희를 맛보며 최후를 마쳤다는 수행자의 진술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고의 극복 방법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잘 예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시대가 어지럽고 혼란스럽지만, 아우슈비츠 인간 도살장에서도 평온과 환희심을 낳게 해 준 마음공부 방법이라면 어떤 상황인들 극복 못할 것인가.
그것은 마치 막힌 곳으로만 알려진 고통의 극점이 바로 그것을 벗어나는 출구임을 말해주는 소식이기에.
지금까지 '당하는 죽음'과 '챙기는 죽음'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통의 극점에서 고통의 뒤안길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 슬픔의 뒤안길서 만나는 순수한 기쁨이 있다는 것을 누구나 맞이할 죽음 앞에서 모두가 알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금 이 순간, 올라온다.
깊고 깊은 슬픔과 고통들이 마치 친근한 벗처럼 느껴지는 순간, 문득 용기가 솟아나 되려 희열 같은 느낌이 엄습할 수 있다는 것, 누적된 업을 깨고 올라오는 진하기 그지없는 슬픔의 맛은 오히려 서늘한 진정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 하여 고통의 극점이야말로 고통을 벗어나는 출구라는 것!
매찰나 일어나고 있는 물심의 현상 그 자체는 환이지만, 그것이 없이는 해탈도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이 전부임을, 그저 바로 지금 여기를 경험할 뿐임을 기억하련다.
아, 불교공부는 마음공부이고, 과학공부도 마음공부이며, 삶 자체가 마음공부인 '나'는 지독한 관념놀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고군분투하게 될 것 같다.
그 고군분투가 스스로를 다그치고 괴롭히는 게 아니라, 흙, 공기, 물, 불, 원소 그 자체가 되고 슬픔, 고통, 공포, 기쁨, 환희, 행복 그 자체가 되어 매 순간 '완전연소'하게 된다면, 생각의 찌꺼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일을 그치게 될까?
그럴 수 있기를!
오늘 노동법률 이야기(4)는 이 분야를 업으로 삼게 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공인노무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은 대학 4학년때였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노동'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단과대 농활대장을 5회나 했으며, 아버지께서 자그마한 택시회사 노조위원장을 7년이나 하셨던 것은 내 삶이 '노동(그것이 종속노동이든 일상적인 노동이든)'을 화두로 삼기에 충분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대학교 1학년 때 조영래 변호사가 펴낸 <전태일 평전>을 읽었기 때문에 4학년이 되어 취업을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공인노무사'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기어이' 찾아냈던 것 같다.
물론 노무사가 될 결심을 하고도 제대로 된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스물아홉의 강을 건널 때부터였지만, 대학 졸업 후 5년 가까이 학원강사 등을 하며 방황하던 시절에도 김형배 <노동법>은 밑줄 쫙쫙 그어가며 1회독 했다.
스물아홉 살 여름의 끝자락이던 8월 말, 나는 빡빡머리를 밀고 합천 해인사 근처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2년간 노무사 공부와 불교공부, 그리고 삼천배를 해가며 오롯이 완전연소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고, 결국 최종합격하였다.
수험생활의 포인트는 매일 7시 30분 전후에 일어나 적당량의 세끼 식사를 같은 시간에 하고 밤 10시 전후에 잠드는 루틴이 어김없이 반복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일상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은 목표를 향해 매진하는 시기에 반드시 지켜야 할 일이라고 본다. 그게 깨지면 기본이 무너지게 되니까.
암튼, 지금 생각해도 오십여 년 내 인생 중 가장 치열했던 시기였기에, 그 시절을 떠올리면 만족감이 올라온다.
2004년 11월부터 현재까지 22년 차 노무사로 살고 있는 '나'는 주로 조직 안에 들어가서 일을 하였다.
개인 노무사 사무소도 몇 번 해봤지만, 영업력이 부족했기에 조직 안에서 역할을 하면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제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은 고향인 강원특별자치도에서 3년 7개월째 도청 내부 근로자 노사관계를 담당하는 노무사로 살고 있다.
노사관계는 '관계'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관계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존재 자체가 '연기적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환'이라고 본다면, 노사관계의 역동성도 가히 짐작할 만하다 할 것인데, 개별 근로자이든 노동조합이든 생존권을 중심에 두고 노사관계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고통스럽지 않다면 그건 "찐"이 아니다.
노사관계의 대립과 상생은 동전의 양면인데, 불교의 생멸문과 진여문 역시 동전 없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본다면 대립과 상생은 결국 '하나'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도청은 작년부터 광역 지자체 최초로 다음 연도 임금교섭을 전년도에 미리 하도록 해왔는데, 내년 임금교섭의 마무리를 향해 가는 요즘, 고통이 크다.
이런 와중에 슬픔과 고통의 뒤안길서 만나는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 고통을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하려고 한다. 상대를 미워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온전히 끌어안으면서도 현재 우리 도청의 상황과 조건에 맞게 마무리하는 것이 관건인 셈이다.
2018년 말부터 사용자 측 노무사가 된 나는 그 '역할'에 맞게 '환'과도 같은 삶을 직시하려고 한다.
역할놀이 중임을 알면서도 '고통'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 '고통'의 나락에 떨어질 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2년 차 노무사가 되기까지 받았던 고통은 어느새 삶 자체가 되었고, 나는 여전히 이 "업"을 좋아한다.
"마음공부와 함께하는 노동법률 수업"이라는 제목을 달고 여기까지 왔는데, 마음공부는 마음공부대로, 노동법률 수업은 수업대로 각각 하면서 밀고 나온 것 같다. 둘의 접점이 잘 융화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실감하지만, 삶의 두 축이 되어버렸으니 계속 갈 수밖에 없겠다.
나의 이 두 가지 공부길은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그저 배움의 길일 뿐이다.
이 두 가지 공부가 충돌 없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 올까?
그렇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