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와 함께하는 노동법률 수업"의 에필로그
얼마 전, 도올 선생의 강의를 듣다가 한마디가 귀에 들어왔다.
"원효는 불성과 여래장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한 게 아니라 실천론적으로 이해했어요."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올라왔다.
'그래, 그랬을 거야! 불성과 여래장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교의 핵심인 '무아'에 위배되지.'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사성제"라고 표현한다.
고, 집, 멸, 도!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그런데, 12연기가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의미하니, 사성제와 연기는 배대한다.
또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바로 중도인데, 붓다는 중도가 팔정도라고 하셨으니 중도는 실천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중도를 달리 표현하면, '중'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연기'이기도 하므로 연기와 중도와 사성제가 맞물려 돌아가게 된다.)
연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조건생멸'이니, 삼사화합의 인연이라는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므로 끊임없이 변하며(무상), 연기적으로 존재하니 고정된 실체는 있을 수 없어서 '무아', 곧 '공'이다.
(연기적 존재하니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얻을 것도 없다. 무득.)
그리고 찰나생멸하고 있는 현상을 떠나 별개로 존재하는 불변하는 '무엇'이나 '바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생멸하는 작용 그 자체가 바탕을 포함하여 전체이니 둘이 아니어서 '불이'이다.
(선불교에서는 불교의 핵심을 '불이중도'라고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불교교리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바로 '나'는 색수상행식, 즉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오온은 (반야심경에 의하면) '개공'이어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이러한 오온개공을 비추어 본다는 의미가 '조견오온개공'이고, 이렇게 하면 '도일체고액', 즉 온갖 고통을 건너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나'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꿰뚫어 알면 고통을 여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까지가 불교교리의 역할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처럼.)
근데, 이토록 생생한 이 '나', 즉 몸뚱이, 생각, 느낌 등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 이 '나'를 우리는 통제할 수 없다. 그저 주의를 기울여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물심의) 현상을 경험할 뿐이다. 따라서 이를 꿰뚫어 알게 되어(체득하게 되어) '아하!' 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자기에 대한 집착에서 풀려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수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견도'가 먼저라는 것이고, 그 이후 수도, 무학도로 나아가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다만, 이 몸뚱이와 생각과 느낌 등을 '나'로 고정시켜 온 습기가 제거될 때까지 거듭거듭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수행'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습기가 완전히 제거되면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이나 느낌 없이 그저 할 뿐인 상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럼,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이 '나'를 고정된 실체로 보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하는 지독한 아상 때문에.
그래서 붓다는 고통의 원인인 '나'에 대한 '갈애', 그리고 진리(사성제)를 모르는 '무명'을 제거하기 위해 팔정도 수행을 하라고 하셨다.
팔정도의 첫 번째는 정견(바른 견해)인데,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을 말한다. 사성제-12연기-팔정도(중도)-무상-무아-공으로 이어지는 불교의 핵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팔정도의 두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는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바른 사유(생각), 바른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직업), 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집중이다.
여덟 가지를 세 가지로 재분류하면 '계정혜' 삼학이 되는데, 계(정어, 정업, 정명), 정(정정진, 정념, 정정), 혜(정견, 정사유)로 이해하면 된다.
결국, 우리는 바른 삶을 살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가장 상식적이고 평범한 진리로 돌아왔다.
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삼업이 되는데, 바른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면서 살려고 노력하면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게 된다.
금강경에서 일체의 현상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다고 했으니 조건생멸하는 현상을 매 순간 경험하면서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함이 없는 함'을 실현할 수 있기를 발원해 본다.
그리고 마음공부를 해가면서 밥벌이(=노동)를 하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자기에 대한 집착이 조금씩 엷어질 것이니, 그만큼 더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혹자는 남녀 간의 사랑과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종교적인 사랑을 조금씩 색깔이 다른 것으로 분류하나, 내가 보기엔 다 같은 사랑인 것 같다. 사랑에 금이 갈 때는 주로 자기애가 지나쳐 자기를 내세우는 상황일 때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이 '나'가 너무나 생생하고, 자기에 대한 집착도 강하여 이토록 고통스러우나, 마음공부를 계속해가면서도 무아의 실천, 즉 자기를 조금씩 내려놓고 자기 아닌 존재를 사랑하는 일을 직접 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결국, 아무리 고통이 우리를 엄습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전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