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보는 자, 운명을 보는 곳

#무속신화 #서사무가 #나의 근원을 찾아 #원천강 #본풀이

by helmi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오늘', <원천강 본풀이>


“너는 어떠한 아이냐? 이름은 뭐야? 어디서 왔니?”
“저는 부모님도 모르고 이름도 성도 나이도 모릅니다. 그냥 이 들에서 태어나 여기서 살아왔어요.”
“그렇다면 네가 오늘 우리를 만났으니 오늘을 생일로 삼고 이름도 오늘이라고 짓자꾸나.”


아득한 옛날, 적막한 들판에 한 아이가 나타났습니다. 학의 보살핌으로 살았던 아이는 자신이 누군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 "오늘이"라 불리게 된 아이는 마을로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족끼리 정겹게 어울려 사는 이웃들을 보니 새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졌습니다. 어느 날 자신을 친자식처럼 돌보아 준 백씨 부인에게 부모님이 원천강에 계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길고 긴 여행을 떠납니다.


백씨 부인은 우선 별층당에 앉아 종일 책만 읽는 장상 도령에게 길을 물어보라 일러주고, 장상이는 연꽃 나무에게, 연꽃나무는 큰 뱀에게, 뱀은 매일 처녀에게, 매일이는 선녀에게 물어보면 원천강에 도착할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각자 오늘이에게 부탁을 하나씩 합니다.


“저는 오늘이라고 합니다. 부모님을 찾아서 원천강을 가고자 하니 길을 알려주세요.”
(중략)
“저는 장상이랍니다. 원천강에 가시거든 제 사연도 좀 알아봐 주세요. 왜 밤낮 여기에 앉아서 글만 읽어야 하고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지를요.”
(중략)
“원천강에 가시거든 내 신세를 좀 여쭈어 주세요. 나는 겨울에 뿌리에 움이 들어 정월이면 몸속에 들고 이월이면 가지로 옮겨가고 삼월이면 꽃이 피는데, 항상 맨 윗가지에만 꽃이 피고 다른 가지에는 피지 않으니 어찌 된 연유인지 알 수가 없답니다.”
(중략)
“원천강 가는 길 인도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오. 다른 뱀은 여의주를 하나만 물고도 용이 되어 올라가는데, 나는 여의주를 셋이나 물고서도 용이 못 되고 있으니 어쩌면 좋겠는가 알아봐 주세요.”
(중략)
“나는 매일이라고 합니다. 하늘나라 살다가 죄를 받아 여기서 매일 글을 읽게 되었지요. 원천강에 가거든 언제나 이 신세를 면할 수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이렇게 여러 번 묻고 물어서 가까스로 도착한 원천강 앞에는 웬 험상궂은 문지기가 서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불쌍한 오늘이가 아무리 사정해도 문지기는 막무가내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오늘이는 눈앞이 캄캄해져서 땅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난감해진 문지기가 안으로 들어가 그 사실을 고하니, 신관이 아이를 안으로 들이라 하였습니다.

“너는 어떤 아이인데 여기를 왔느냐?”

오늘이는 빈들에서 학의 보살핌에 깃들어 홀로 살던 일부터, 수만 리 길을 헤치고 부모를 찾아온 사정을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단상에 앉아 있던 신관 선녀가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눈물을 지으며 뛰어 내려와 오늘이를 감싸 안았다.

“그 먼 길을 어찌 찾아서 여기를 왔단 말이냐. 얘야, 우리가 너의 부모로다. 너를 낳던 날 옥황상제께서 우리를 불러 이곳을 지키라 하니 어느 명이라 거역할까. 몸은 비록 떠나왔으나 마음은 그곳에 남겼으니 너를 돌봐준 학은 우리가 보낸 것이란다.”

“어머니, 아버지……”


그렇게 오늘이는 부모님과 함께 이승의 사계절이 공존하는 신비한 공간, 원천강을 구경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삽화 출처: 어린이 책 <사계절의 신 오늘이> (한겨례 어린이)


그리고 장상이, 연꽃, 뱀, 매일이 부탁한 일들을 이야기하자, 부모님은 하나씩 답을 해주셨습니다.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오늘이는 제일 먼저 매일이를 만나고, 그다음은 큰 뱀, 연꽃나무, 마지막으로 장상이를 만납니다.

“매일이님, 부모님을 만나 뵙고 매일이님 일도 알아왔답니다. 저와 함께 가면 소원이 풀릴 테니 함께 떠나요.”

“뱀아, 네가 하늘에 못 오르는 건 여의주를 세 개나 물었기 때문이야. 하나만 물으면 용이 될 수 있다는구나”

그러자 뱀은 얼른 여의주 두 개를 뱉어서 오늘이에게 주고 하나만 입에 문 채 몸을 뒤틀었다. 뱀은 힘찬 소리와 함께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나무야, 윗가지에 핀 꽃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주면 가지마다 꽃이 핀다는구나."

연꽃나무는 얼른 윗가지에 핀 꽃을 꺾어서 오늘이에게 주었다. 그러자 가지마다 꽃봉오리가 싹트면서 탐스러운 꽃이 송이송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오늘이와 매일이는 다시 길을 걸어 흰모래 마을 별층당에 이르렀다. 장상이가 예전처럼 글을 읽고 있었다.

“원천강에서 장상이님 일을 알아왔어요. 장상이님처럼 몇 년간 홀로 글만 읽어온 처녀를 만나 짝을 이루면 만년영화를 누리실 수 있답니다.”

“그래요? 세상에 그런 처녀가 어디 있을까요?”

“벌써 이렇게 모셔왔답니다. 매일이님이에요. 두 분이 짝을 이루시면 행복해지실 거예요.”

장상이와 매일이는 서로를 마주보며 손을 꼭 잡았다.


오늘이는 전에 살던 마을로 가서 백씨 부인을 찾아갑니다. 백씨 부인에게 부모님을 만난 일과 오가며 겪은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고, 큰 뱀한테서 받은 여의주 한 개를 선물로 드렸답니다.


그 후 오늘이는 옥황상제의 부름으로 하늘나라 신녀가 되어 원천강의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 손에 영롱한 여의주, 한 손에 화사한 연꽃을 든 채로.


이성강의 애니메이션 <오늘이>에서 오늘이와 큰 뱀, 오늘이와 연꽃나무, 매일이와 장상이가 만나는 장면




운명을 보는 자, 운명을 보는 곳



원천강 신녀 '오늘이'의 내력이 담긴 <원천강본풀이>(袁天綱本-)는 제주도의 무속신화이자 서사무가입니다. <원천강본풀이>가 오래전 신굿에서 구연되었다는 사실은, 원천강과 이승을 매개하는 오늘이의 행보가 신을 모시는 심방(무당)의 행보와 동일시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원천강' 袁天綱은 무엇일까요?


원천강(袁天綱)은 7세기 무렵 당나라에 살았던 실존 인물로 관상이나 풍수, 또는 점술에 능했다고 합니다.

제주도의 일부 본풀이에서 원천강은 점서(占書), 점술가(占術家)등 점과 관계된 것으로 지칭되거나, 인간의 팔자(八字)를 뜻하는 단어로 나오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제주도 무속 신앙에서 '원천강'은 운명, 예언가, 사주팔자와 연관 지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천강본풀이>, <초공본풀이>, <세경본풀이> 등 원천강이 등장하는 무가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원천강에 가거나 원천강(점서)을 보면 팔자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원천강과 관련된 본풀이들이 굿판에서 활발하게 실행되던 때, 향유 집단 사이에서 ‘삶을 개선하려면 미리 운명을 알아야 한다’는 운명관이 널리 공유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서입니다.


오늘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원천강으로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불안은 이상 세계에 대한 환상과 그곳으로의 일탈을 촉구합니다.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인간의 열망은 <원천강본풀이>에서 만물이 순환하는 사계절을 품은 시간과 운명의 근원지 '원천강'을 창조하였고, 그렇게 그곳과 이승을 매개하는 운명의 신神, '오늘이'가 탄생하게 된 것이빈다.


오늘이는 신녀로 좌정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홀로 견뎌내었습니다. 이 고된 여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오늘이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것은 외로움, 그리움, 절망 등 삶의 모든 아픔을 극복한 자만이 운명을 다스리고 이계二界를 오가는 신神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무속관巫俗觀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장상, 큰 뱀, 연꽃 나무, 매일이가 겪는 고민의 해답은 '완전한 존재가 아닌 결핍된 존재들이 어울려 서로의 결핍을 채울 수 있다'는 상생과 '더 크게 되기 위해서는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는 나눔의 미학을 시사합니다.


오늘이의 신계神界 여행담은 여전히 현대인에게 신비로운 감동을 선사합니다. 자신의 근본을 찾아가는 오늘이 이야기에 자아 정체성에 대한 인간의 번민, 삶에 대한 실존적 고뇌 등 현실과 관련된 예사롭지 않은 신화적 사유가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원천강본풀이>라는 제목으로 채록된 각편은 박봉춘 구연본과 조술생 구연본이 현전하지만, 이 두 작품은 전혀 다른 내용을 취하고 있습니다. 박봉춘의 <원천강본풀이>에서 '원천강'은 천상에 있는 공간의 이름으로, 오늘이라는 주인공이 원천강에 다녀와서 신녀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한편, 조술생 심방이 구연한 <원천강본풀이>는 역적으로 몰려 잡혀간 남자의 아내가 '원천강'이라 불리는 점쟁이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한 남자가 왕이 되려고 한다. 나라에서 그를 잡아 죽이려고 사령(使令)을 보낸다.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 아내에게 자신의 종적을 모른다고 하라며 장판 뒤 독을 심어 숨는다.
사령이 남편을 잡으려 하나 찾지 못하여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사령이 꾀를 내어 한 여인과 아이를 남자의 집으로 보내 남편이 외도한 것처럼 꾸미니, 그 아내가 화가 나 독을 열고 남편에게 따져 묻는다. 결국 사령에게 들켜 남편이 잡혀간다.

남편이 잡혀가면서 한탄하기를,

“사흘만 있었으면 하늘에 올라가 왕이 될 것인데 부인이 입을 잘못 놀린 것 때문에 내가 잡혀가는 것이니 너는 살 수 없을 것이다”라 하며 부인에게

“원천강이나 보며 살아라. 너의 팔자다”라고 말한다.

그 후로 부인은 '원천강'이라고 불렸다.

- 조술생본 <원천강본풀이>

이 <원천강본풀이>는 남편은 하늘의 뜻을 깨우친 영웅으로 곧 국가권력의 제거 대상이 되었으며, 훗날 그 부인이 점서 <원천강>을 보면서 운명을 점치는 점술가 ‘원천강’ 이 된 내력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원천강본풀이>에서 오늘이가 가는 길은 '복福을 타러 가는 여행담', <구복여행> 설화와 구조가 매우 유사합니다.


한 총각이 신에게 복을 빌러 떠난다. 도중에 여인(혹은 노처녀나 과부)·노인(혹은 도령)·이무기(혹은 용)를 차례로 만나, 시집 못 가는 이유(혹은 남편이 자꾸 죽는 이유)와 배나무에 배가 열리지 않는 이유 그리고 용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달라는 청을 받는다. 총각이 마침내 신을 만나 그 해답을 구하자, 신은 총각에게 네 자신의 복은 집에 돌아가면 자연히 얻어질 것이요, 여인은 처음 만난 사람과 혼인하면 될 것이며(혹은 여의주를 가진 남자를 얻어야 하며), 노인은 배나무 밑에서 금은보화를 캐내면 배가 잘 열릴 것이고,이무기는 여의주 하나(혹은 둘)를 총각에게 주면 될 것이라는 해답을 준다. 총각이 돌아오는 길에 각각 그 해답을 일러주니 모두가 소원을 이루게 되고, 마지막에 총각은 여의주를 얻고 금은보화도 얻으며, 여인과 혼인하게 된다.

- 구복여행 설화


<원천강본풀이>와 <구복여행>설화 모두 삶의 자연스러운 이행 (뱀이 용으로 승천하기, 꽃잎이 전체로 피어나기 등)이 일어나지 않는 '문제적 상황'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운명의 전달자' 덕분에 굳이 원천강에 가거나 신을 만나지 않더라도 본인의 운명을 미리 알 수 있었고, 삶의 다음 단계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원천강본풀이>의 경우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점이 두드러집니다. 이러한 운명관에 따르면, 삶의 개선을 위해 운명을 아는 것은 필수인 것처럼 보입니다.




참고 문헌

고은임,「원천강본풀이」연구: “오늘이” 여정의 의미와 신화적 사유. 관악어문연구 35, 2010.

유정월. <원천강본풀이>의 운명관 연구. 한국고전연구(韓國古典硏究) 42, 2018.

원천강본풀이, 문화콘텐츠닷컴


사진 출처

Kudryashka

이성강 감독 단편 애니메이션 <오늘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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