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던 사람과 헤어지고 6개월이 지났다. 주말마다 집에 있기가 뭐해서 아무 모임에나 나갔다.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기도 했다. 별생각 없이 웃고 떠들어도 마음 한 켠의 허전함은 쉬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공백에는 아직 뜨뜻미지근한 온기가 남아있어서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이나, 지나간 사람에 대한 그리움 따위가 명확하게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도 저도 아닌, 그저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 대화하다 문득 구 여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한 명 말고 모두. 그러니까 나의 전 여자 친구와, 전전 여자 친구와, 전전전 여자 친구 같은.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 문제에 대해 이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말이 마치 열쇠처럼 내 정신의 일부를 열어젖혔다. 도리 없이 추억의 동전이 떨어져 내렸다. 나는 먼지를 불어내고 앞뒤로 꼼꼼히 들여다봤다. 그리고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나 하루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그걸 꺼내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한 달여, 결국 나는 고민을 그만뒀다. 일주일 정도 휴가를 내고 그녀들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시간이 꽤 흘러서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첫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십오 년이 넘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차근차근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나 대체로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알게 된 것도 소문에 불과했다. 누구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고 하고, 누구는 수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문이란 게 늘 그렇듯 명확한 것은 거의 없었다.
연락처를 구한 사람은 총 세 명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이얼이 울리자 생각보다 더 긴장이 됐다.
첫 번째 번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중에 누구냐고 문자가 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녀는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비쳤다. 이미 결혼한 지 5년이 넘었고, 아이도 있는데, 아무래도 이런 연락은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순순히 받아들이고 뒤늦은 축하인사를 건넸다.
두 번째 번호는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아주 높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라이터랑 구두는 다 갖다 버렸다고!”
그리고 전화가 뚝 끊겼다.
라이터? 구두?
그런 걸 주거나 선물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그날 내내 생각해 보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끝내 알 수 없었다.
세 번째 번호는 나라는 인간 자체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누구라고?”
그녀와 나는 2년이나 만났다. 2년 동안 매일 밤마다 적어도 30분은 통화를 했다. 그러니까 내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나는 그녀가 장난을 치는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불만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다가, 그냥 잘못 걸었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저녁. 늦은 산책을 다녀와 씻고 나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세 번째 번호였다.
“미안해. 어제는 정말 기억이 안 났어.”
나는 그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불만을 표현할 입장도 아니었다.
“잘 지내?”
나는 그럭저럭,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아무런 기척도 없는 차갑고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당연히 먼저 연락한 내가 말을 꺼내야 했다. 그러나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왜 이렇게까지 그녀들에게 연락하려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유 같은 건 너무나 당연해 보여서 생각조차 안 했는데... 막상 떠올리니 뚜렷하게 잡히는 게 없었다.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다.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옛날 여자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남자라니. 생각해보니 정말 형편없는 짓이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는 질 낮은 후회에 휩싸여 얼른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러지 말고 만나서 이야기할까?”
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가 장소와 시간을 문자로 보내줬다. 연남동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였다. 불현듯 거기 나갔다가 무슨 몹쓸 짓을 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당연히 그럴리야 없겠지만.
주말 저녁이었다. 약속 시간 한 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일찍 와있다는 사실이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봐 근처에서 서성였다. 담배를 피우고 핸드폰으로 스포츠 뉴스를 뒤적거렸다.
약속 시간 5분 전에 카페에 들어갔다. 내가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가 들어왔다. 그녀와 만나는 것은 그러니까... 6년 만이었다. 그녀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헤어스타일도, 옷차림도, 게다가 마스크까지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봤다. 아마 외모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이 가진 어떤 분위기 같은 걸 감지했던 것 같다.
우리는 카페에 마주 앉아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직장은 어떤지. 6년 사이에 우리는 직장도 달라지고 사는 곳도 달라졌다. 사귈 때는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라서 꽤 편했었다. 가까우니 늦은 밤에 갑자기 찾아가서 만나기도 했다. 지금은 서울 시청을 기준으로 정반대의 위치에 살고 있다. 그래도 결론은 둘 다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행이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나도 똑같이 생각했다.
문득 나는 그녀와 사귀던 시절을 떠올려봤다. 소소한 에피소드를 떠올려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기억이 아예 없다기보다는, 기억의 단서를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가느다란 줄 하나만 잡아당기면 줄줄이 딸려 나올 것 같은데... 나는 처음에 그녀와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 기억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반대로 이별의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무슨 생각해?” 하고 그녀가 물었다.
나는 가만히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우리 헤어졌을 때.”
“그건 왜?”
“그냥.” 내가 말했다. “갑자기 궁금해서.”
“어떤데?”
그녀와 나는 카페에서 헤어졌다. 지금과 거의 비슷한 시간대에 비슷한 분위기였다. 창으로 오후 느지막한 햇빛이 드리우고, 수다스러운 사람들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우리는 각자의 침묵을 속으로 세고 있었다. 나는 그 침묵의 이름이 이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렀다. 왜냐하면 이별의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런 말 하는 거 좀 별로 같은데.” 나는 멋쩍게 말했다. “우리 왜 헤어졌지?”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떨궜다.
“글쎄.”
그녀는 오른손으로 왼 손목에 있는 팔찌의 알을 하나하나 셌다.
“더 이상 만날 수 없어서 헤어졌겠지?” 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 이유 말이야. 헤어져야 하는 이유.”
우리는 또다시 침묵했다. 내가 자꾸만 어색한 상황을 만드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기분을 나쁘게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이 늘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나의 요구나 바람 따위는 실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헤어져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기보다는, 헤어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거야.”
나는 잠시 그 말에 대해 생각해봤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쩐지 이해가 됐다.
“그런가.”
“그건 왜?”
나는 피식 웃었다.
“그냥. 궁금했어. 살면서 몇 번이나 이별했는데, 생각해보면 그 이유를 잘 모르겠어서. 그러면 안 되는 거 같은데. 좀 이상하기도 하고.”
“그건 별로다.” 그녀가 말했다. “그러지 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라고 원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그동안 누구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거나, 이별하면 모든 걸 깨끗이 잊어버린다거나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이별은 언제나 내게 무언가를 남기고 대신 무언가를 가져갔다. 그래서 마치 기억을 상실한 것처럼 그 인과를 정확히 떠올릴 수 없는 것이다. 접합부가 다르게 생긴 블록이나, 그림이 뒤섞인 퍼즐처럼.
그러나 그런 걸 순순히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남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짓말로 치부하거나 그녀처럼 타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이유를 다 알면서 모른 척하지 말라고.
“그러게.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또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우리는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무언가가 결정적으로 생겨났고, 또 결정적으로 사라졌다. 그 과정을 겪은 뒤는, 그 전과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누워 의미 없는 생각들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이번 주말에는 뭘 할까? 그 생각에는 어떠한 설렘도 기대도 없었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익숙하고 지루한 감각만 남아있었다. 언제쯤이면 이런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그게 가능하긴 한 걸까?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눈을 감았다. 나는 왜 그녀와 헤어졌을까? 그리고 왜 그녀를 다시 만난 걸까?
그러나 역시 의미 없는 생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