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은 없다"를 읽고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저녁 8시쯤 집에 도착한다. 두 세시간 정도 책을 읽고 글을 끄적인다. 나는 언젠가 내 이름으로 책을 출판하는 인생의 버킷 리스트를 갖고 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나는 콘텐츠의 부족을 여실히 느낀다. 비겁한 변명이라고 할 테지. 분명 평범한 회사원으로서 책을 쓴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맞는 말이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케케묵은 말을 꺼내지 않아도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말은 자기방어를 위한 변명을 담고 있다.
하지만 전혀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평범한 일상에도 할 이야기가 있는 건 맞으나 한 사람의 내면을 뒤흔들만한 이야기는 극적인 순간에 더 많이 나온다. 전쟁이나 재난과 같은.
"만약은 없다 - 남궁인"
이 책의 소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남궁인이라는 작가가 부러웠다.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그에겐 내 일상에서 찾을 수 없는 묵직한 콘텐츠가 있었다.
'그러니 이런 책을 쓸 수 있었겠지.'
책의 첫 장을 넘기기 전까지 이렇게 생각했다. 먼저 작가가 된 그는 나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의 삶의 깊이를 알지 못했다.
책에 실린 글 몇 편을 읽고 멍해졌다. 죽음은 단순히 "숨이 멎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은 누군가의 더러운 욕심에 버무려지기도 했고 전등의 스위치를 내리는 것처럼 태연히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인간의 희.노.애.락의 감정은 폭풍처럼 휘몰아쳤고 작가는 그런 살아있는 감정을 날것으로 가슴에 품어야 했다. 꼭 붙들어도 제어할 수 없는 감정들은 작가를 할퀴고 지나갔다. 육체적 피로만큼이나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으리라. 직접 겪은 적이 없으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때론 글을 읽어 내기가 버거웠다. 문장과 문장 속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받아들이기엔 내가 소화해야 할 감정의 양이 차고 넘쳤다. 카페에 앉아 책을 읽다가 몇 번을 덮었다.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다가 감정이 가라앉으면 다시 책을 펼쳤다. 의학 용어를 제외하면 어려운 말은 없는 데도 전공 서적을 읽는 것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간접 경험을 한 내가 이렇게 힘에 부쳤는데 작가는 응급실에서의 먹먹한 시간을 어떻게 버텨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환자 가족의 슬픔을 가늠할 수 없어 응급실 구석에서 오열했다는 부분을 읽으며 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야 했다.
다행히 그의 책은 죽음과 삶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죽음 부분이 어두운 감정을 다뤘다면, 삶 부분에서는 초를 다투는 급박한 응급실에서 피어나는 삶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뒷부분을 읽으며 그 전에 느꼈던 먹먹한 감정이 어느 정도 사그러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인생의 여정에 마주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삶의 의미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하는 것이나 친구와 함께 하는 맥주 한 잔이 작은 기적이 될 테니까.
책을 다 읽고 나니 작가에 대한 부러움이 옅어졌다. 작가의 어머니가 그가 펴낸 책을 읽기 힘들어했다는 부분에서 특히 더했다. 그의 어머니는 자기가 아들을 고생길로 내몰았다고 자책하고 있었고 작가는 자기가 쓴 글이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속상해했다.
작가가 되고 싶은 내게 되물었다. 이 책의 저자가 겪은 투박한 마음의 상처를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내가 절실한지. '그렇다.'라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오늘따라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가식적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