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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진 Nov 14. 2016

어느 흔한 장례식



 연휴 아침,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8시 59분 김 과장님. 받을지 말지 고민하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미안한데, 지금 빨리 회사로 출근해서 문자랑 이메일 좀 돌려야겠어. 팀장님 장인어른이 돌아가셨거든."

 "아 네. 알겠습니다."


 잠이 덜 깨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나도 모르게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 오늘이지. 밤에 숙직도 서야 하는데.'


 평소에 인간적으로 좋아하던 팀장님이었기에 곧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았으면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데. 마음을 고쳐먹으려 노력하며 일어나 샤워를 했다. 옷을 갈아입으며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 출근해요."

 "왜? 숙직은 밤이잖아."

 "팀장님 상당하셔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밥은?"

 "배 안 고파요. 금방 끝날 테니 갔다 와서 먹을게요."


 현관을 나서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왔다. 김 과장님이다.


 "도착했어?"

 "지금 가고 있습니다."

 "빨리해야 하는데, 우현 씨 전화해서 같이 출근하라고 해."


 계속해서 전화하는 과장님은 전형적인 상사 맞춤형 인간이다. 윗사람에겐 잘하지만, 부하 직원의 사정은 봐주지 않는다. 조금 늦는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전화는 계속 걸려오고 혼자서 할 수 있는데도 굳이 다른 사람을 불러서 빨리 처리하라고 닦달을 한다. 휴일에 출근하는 사람의 기분은 안중에도 없는 걸까. 회사원으로서 힘든 부분이 인간관계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오늘따라 야속하다.


 우현 씨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는다.

‘깨어있어도 받기 싫을 거야.’

 메시지를 보내두고 서둘러 차에 시동을 건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선 사무실은 적막하다.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컴퓨터를 켠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이리저리 시스템을 살펴보고 있는데 또 전화가 온다.


 "도착했어?"

 "네. 지금 도착해서 경조사 시스템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일단 우리 지부에 연락 돌리고, 다른 데는 다시 알려줄게. 휴일이니까 문자가 더 중요한 거 알지?"

 "네. 알겠습니다."

 "우현 씨는 아직 도착 안 했어?"

 "전화를 받지 않아서요. 메시지 보내놨습니다."

 "바빠 죽겠는데. 조기(弔旗)도 챙겨야 해. 알았지?"


 과잉충성도 병이라고 생각하며 장례 물품을 신청한다. 문자와 이메일을 보내려는데 과장님의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 연락해야 할 부서가 하나둘 추가된다. 사람 수 역시 늘어난다.


 큰 그룹을 지정해서 보내면 클릭 몇 번에 끝났을 일이었다. 중복해서 보내면 안 되기에 이미 송부한 부서를 제외하고 한 부서씩 보내다 보니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린다.


 답답한 마음에 수신자 목록에 보낼 사람 전체를 밀어 넣었다. 2,400명. 내 핸드폰에 저장된 연락처가 300명인데 이천 명이 넘어가는 숫자라니 어마어마하다. 제일 중요한 계좌번호와 예금주를 몇 번씩 확인한 후 눈을 딱 감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수신인이 500명을 넘을 수 없습니다.'


 한숨을 내쉬고 그냥 원래 방식대로 하기로 한다.

 타인이 상을 당했는데도 감정의 조각들이 부정적 단어들로 채워지는 것을 보며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한 번 더 느낀다. 인품이 좋기로 소문난 팀장님이었고 부서원들도 잘 챙겨주셨기에 죄책감이 더 컸다.


 전송된 문자를 읽다 통화버튼을 눌러 잘못 걸려온 전화들 사이로 부조금 부탁을 받았다. 3만 원, 5만 원, 10만 원. 전화는 부장님과의 인간관계를 지폐 몇 장으로 환산하고 나서야 끊어졌다. 돈이 제일이라는 물질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사람 사이의 관계가 숫자 몇 개로 정리되는 광경을 보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나도 예외는 아니다. 부서원과 액수를 상의한다. 조금 더 넣는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 남들보다 적게 내는 것은 꺼림칙하다. 여러 이야기가 오간 끝에 5만 원으로 정했다. 팀장님과 나의 관계는 5만 원 짜리인걸까. 헛웃음이 난다.


 문득 내가 상을 당했을 때 부조금을 받지 않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한다. 마음속으론 그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실행에 옮기는 건 힘들 것 같다. 그동안 내가 낸 게 있으니 최소한 손해는 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이 생각이 부조문화가 사라지지 않는데 한몫을 하는 거겠지.


 일을 마무리하고 나니 오후 3시가 넘었다. 12시 전에 끝날 거로 생각했는데 계속 울려대는 전화에 일이 늘어졌다. 일찍 끝날 줄 알고 숙직설 때 필요한 짐을 챙겨오지 않았는데, 미리 준비할 걸 그랬다. 서둘러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했다.


 "밥은?"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가 묻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무슨 회사가 밥도 안 먹이고 일을 시키냐면서 속상해하신다. 챙겨 먹을 순 있었는데 정신이 없었다고 대답하고 얼른 짐을 쌌다.


 밥부터 먹으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뜨끈한 국물을 후루룩 넘기니 미처 몰랐던 허기가 밀려온다. 미역국에 밑반찬 몇 가지뿐인 단출한 밥상이지만 상했던 속이 풀리는 느낌이다. 이래서 밥심, 밥심 하는 걸까. 쉴 새 없이 숟가락을 움직이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울린다. 김 과장님이다.

 "너! 내가 기획 쪽에 문자 돌리라고 했지?"

 다짜고짜 소리치는 통에 풀렸던 속이 얼어붙는다.

 "죄송합니다. 제가 여러 군데 보내다 보니 까먹은 것 같습니다."

 "까먹어? 지금 어디야? 당장 가서 보내!"

 "네. 알겠습니다."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고 미역국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저히 손이 가지 않는다. 식탁에서 일어서려는데 어머니가 억지로라도 다 먹으라신다. 한 숟가락을 입에 밀어 넣으니 밥알 하나하나가 껄끄럽게 느껴진다. 결국, 다 먹지 못하고 일어선다.


 현관문을 나서는데 식탁을 정리하는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회사 일을 괜히 어머니께 티 낸 걸까. 오늘따라 11층까지 올라오는 엘리베이터가 느리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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