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러운 출장이다. 게다가 1박 2일. 연휴가 끝난 다음 날이라 밀린 업무도 만만치 않은데. 급한 것만 처리하고 차에 올랐다. 상사를 태우고 1시간 반 정도를 운전해 목적지에 도착했다. 현장에서 진행된 회의는 지루했다. 내 업무와 중첩된 부분이 거의 없다. 이럴 거면 왜 부른 건지 불만이 삐죽 튀어나온다. 현안사항 공유 때문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역시나 비효율적이다. 커피를 마시며 버텨보지만 멍하다. 그래도 졸지는 않은 것 같다. 내 생각엔.
업무를 마치고 저녁을 먹었다. 운전하느라 피곤해서인지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차를 끌고 번화가 쪽으로 향한다. 그편이 숙소를 구하기 쉽기 때문이다. 동행한 상사들이 맥주 한잔 하자고 꼬신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하며 완곡히 거절했다. 다행히 더 이상 권유하지는 않았다. 사거리에 상사들을 내려주고 숙소를 찾는다. 모텔 A. 외관도 깔끔하고 저기가 좋겠다. 주차하고 프런트로 들어선다.
"1인실 세 개요. 계산은 각각 해주시고요."
출장 카드로 결제하고 회계처리를 위해 영수증 세 장을 지갑에 챙긴다. 키와 함께 모텔 명함도 받는다. 명함 사진을 찍어 상사에게 전송한 후 방으로 들어선다. 생각보다 깔끔하지 않다. 외관만 화려한 걸 보니 나 같은 뜨내기들이 많이 오나 싶다.
침대에 드러누웠다. 지루함에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 본다. 재밌게 봤던 예능프로그램이 뻔하게 느껴진다. 심심하다. 시원한 맥주 한잔이 생각난다. 외투를 걸치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짭짤한 감자칩과 500ml짜리 맥주 두 캔을 산다. 편의점을 나서는 길에 주변을 살핀다. 다행히 상사는 없다.
모텔로 돌아오는데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눈에 띈다. 간판은 번쩍이고 있지만, 출입구는 본래 기능과 다르게 폐쇄적인 느낌이다. 맥주캔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양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보인다. 회식을 했는지 벌건 얼굴이었다. 부하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전화를 건다. 웨이터가 뛰어나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아저씨들을 주점 안으로 안내한다.
닫힌 출입구를 바라봤다. 몰려들어간 아저씨들은 개미굴 같은 계단을 내려가 사방이 막힌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술과 안주를 깔아놓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다 접대부가 들어오면 욕망을 채우느라 정신없이 바쁘겠지.
그래도 모두가 좋아서 간 것은 아닐 것이다. 거래처와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상사가 가는데 혼자만 가지 않을 수 없어서, 이것도 일의 일부기 때문에. 사정은 다양할 테지. 슬프게도 틀린 말은 없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맥주 한 모금을 마시는데 협력업체 임원의 말이 떠올랐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원치 않더라도 접대부가 나오는 술집을 가게 될 일이 있을 거라고 했다. 그때는 괜히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잘 놀라고 한다. 잘 놀지 못하면 일이 꼬일뿐더러 모두가 불편해할 것이라고 했다. 너와 나 모두에게 윈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하며 접대부가 나오는 술집을 가야만 하는 상황은 무엇이며, 너와 나 모두에게 윈윈이란 말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직장생활을 오래 하면 이러한 생각이 당연해 지는 걸까? 신나서 이야기하는 임원과 묵묵히 듣고 있는 부하직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임원이 하는 이야기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은 맞든 틀리든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이 옳은 조직문화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머리가 하얗게 세는 것은 인생이 성숙했단 증거라는데 그 임원의 머리카락도 하얫던 것을 보니 항상 맞는 말은 아닌 듯 싶다. 문득 그 임원의 흰머리 너머로 아버지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회사원이었던 내 아버지는 어땠을까. 내 아버지는. 답답하다. 남은 맥주를 다 들이켰는데도 갈증이 나는 것 같다. 맥주를 더 사올까 고민하는데 전화가 온다. 아까 술 한잔하자던 상사다. 피로가 밀려오는 것 같다. 한참이 지난 후 전화가 끊어졌다. 핸드폰 잠금화면을 풀고 힘겹게 통화버튼을 누른다. 받지 않았으면, 이대로 끊어졌으면,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