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은은히 타올라야 한다.
아침 출근길. 현관문을 나서며 옆에 놓여있는 신문을 짚는다. 스마트폰으로 보는 뉴스도 좋지만 신문의 아날로그적 감성과 여러 기사를 한 번에 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계속 구독하고 있다. 하지만 단점이 있다. 오늘처럼 말이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어제 청와대에 영수회담을 제안했고, 저녁 늦은 시간에 이를 취소했다. 회담의 제안과 취소 모두 신문 1면에 실릴 만큼 굵직한 사건이었지만 오늘자 신문에는 영수회담을 제안한 사실만 실렸다. 큼지막하게 쓰인 톱기사와 회담을 제안한 의미를 분석한 관련기사가 민망해 보였다. 기사를 읽으려고 신문을 펼쳤다가 곧 덮었다. 죽은 신문은 시간을 투자해 읽을만한 가치가 없다.
매일 발행되는 일간 신문의 수명은 하루가 적당할 것이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스마트폰의 수명은 대략 3년, 출퇴근길을 함께하는 자동차는 15년이면 될 것 같다. 이렇듯 주변의 모든 것들은 각기 다른 수명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 수명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장수하며 한 세기 이상을 사는 것도 좋지만 기력을 잃어 죽지 못해 사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 70살. 이 정도면 적당할 것 같다.
하지만 오늘 신문처럼 자기 수명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신문은 인쇄 후 생긴 중요한 사건을 싣지 못할 때 그렇고, 스마트폰과 자동차는 고장이 나서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할 때 그러하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생물인 인간은 어떨까?
물론 갑작스러운 사고나 병으로 일찍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육체적인 한계 외에도 이성적인 인간은 삶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요소가 있다. 특히 자존감이 그렇다.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고 믿는 마음인 자존감은 삶을 지탱하는 큰 축이다. 이러한 자존감이 흔들리면 쉽게 우울해지고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주어진 수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나는 자존감이 강한 편이다. 명확한 가치관을 가진 건지 고집이 센 건지 잘 모르겠지만 보통 남의 의견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내 갈길을 간다. 따라서 우울할 일도 적다. 내게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떤 걸 해야 즐거운지 나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뉴스를 틀어놓고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굵직한 사건은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우울하다. 도대체 어디가 끝인지 아득하기만 하다.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 자존감이라면 국가를 지탱하는 것은 애국심일 것이다. 이러한 애국심은 국가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 내 나라라는 주인의식에서 나온다. 그동안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은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투철한 애국심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IMF 때 금 모으기 운동이 그랬고, 연평도 포격사건 때 급격히 올라간 자원입대 지원율이 그랬다. 그리고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반응 역시 그러하다. 100만 명이 모인 집회가 사고 없이 평화적으로 마무리됐다는 사실은 나라를 걱정하는 국민의 애국심을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국민의 마음을 확인한 청와대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오히려 법대로 하라며 당당하게 나온다. 대국민 사과를 하며 검찰 조사를 성실히 받겠다는 말은 온데간데없다. 국민의 분노는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장기전이 되어버렸다. 답답한 일이다.
평화시위로 아무런 효과가 없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겠느냐는 기사를 읽었다. 엇나간 애국심이 나라의 수명을 갉아먹진 않을까 괜스레 걱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