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토요일 밤이었다. 별다른 약속이 없었던 나는 혼자 맥주 두 캔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밖에 나가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취직 후 인간관계에 치이는 일이 잦아진 탓에 가끔은 이렇게 마시는 맥주도 좋았다.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 나를 흔드는 게 느껴졌다. 머리맡에선 어머니가 주저앉듯 쓰러져 남은 힘을 짜내 나를 흔들고 있었다. 머리가 쭈뼛 섰다. 헐레벌떡 일어나 무슨 일이냐고 소리쳤다. 어머니는 너무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려 서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말하는 중간에 이어지는 헛구역질에 깜짝 놀란 나는 급히 옷을 챙겨입었다. 어머니를 부축하자 이미 여러 번 속을 게워낸 듯 시큼한 냄새가 났다.
택시는 잘 잡히지 않았다. 차를 끌고 가자는 어머니의 말에 자기 전 맥주를 마셨다고 대답했다. 오늘 하루만 좀 참을걸. 답답하다. 쓰러질 듯 위태로운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부축하고 있는 내가 심상치 않아 보였던 걸까. 느릿느릿 도착한 택시는 우리를 태울지 말지 여러 번 고민하다 멈췄다. 이미 우리가 서 있던 곳을 한참이나 지나친 뒤였다. 화를 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늦은 새벽에 이런 손님은 꺼림칙할 수도 있을 테니. 하지만 "OO 병원 응급실이요."라고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참는다고 참았는데 완전히 숨기진 못한 것 같다.
한참을 헛구역질하던 어머니는 삶을 토해내듯 말했다. 아마 뇌졸중 같다고. TV에서 똑같은 증상을 봤다는 쓸데없는 부연설명과 함께. 어머니한테 말하는 건지 나에게 하는 건지, 나는 절대 아닐 거라고 소리치고 애써 태연한 척 창밖을 내다봤다. 빨간 신호등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한껏 당황한 나와 달리 응급실에서 만난 의사와 간호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어머니가 수많은 환자 중 한 명이기에 그들의 반응은 당연했으나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머니를 침대에 눕히고 환자복으로 갈아입히기 위해 옷을 벗겼다. 어렸을 적, 신보다 위대했던 어머니는 혼자 옷을 갈아입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참담한 기분이 들었지만, 감상에 빠질 정도로 여유롭지 않았다. 서둘러 옷을 입혀드렸다.
때마침 의사가 들어왔다. 의사는 마비 증상이 없는지 물어본 후 불빛을 비춰 눈동자를 확인했다. 뚫어져라 의사의 표정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 올렸다. 뇌졸중일 수도 있다는 말에 멍한 느낌이 들었다.
MRI 검사를 하고 돌아온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머니는 이따금 속을 게워내며 계속 중얼거렸다.
'내가 쓰러지면 안 되는데. 내가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되는데.'
느껴지는 묵직한 책임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픈 와중에도 어머니의 걱정은 자신이 아니었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큰아들과 졸업하려면 몇 년은 더 남은 작은아들 걱정뿐이었다. 죄책감이 엄습했다. 늦은 시간까지 일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너무 당연하다 생각했다.
어머니가 몇 차례 더 속을 게워낸 후 의사가 들어왔다. 촤르륵 차트를 넘기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 모션 같았다. 드라마에서 중요한 말을 할 때 의사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면 왜 이렇게 유치하냐고 툴툴댔는데 막상 내게 그런 상황이 닥치니 바라볼 수 있는 건 그의 얼굴밖에 없었다.
"검사상으로 보면 뇌졸중이 아닙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발견되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오늘은 진정이 좀 된 후에 퇴원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었다. 그제서야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어머니도 안도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었기에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몸도 안 좋은데 이제 일을 그만두면 안 되냐고. 하지만 역시나였다. 어머니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한소리 하시곤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몇 걸음 걸어가다 아직 좀 어지럽다고 하시기에 자리에 앉혀드리고 계산을 하러 갔다. 총 35만 원. 가지고 있는 현금이 없었기에 카드로 결제했다. '어머니 병원비도 내가 낼 수 있게 됐구나.' 복잡미묘한 감정이었다. 그래도 경제력이 생기니 좋긴 하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를 눕혀드리고 그래도 내일은 쉬라고 말했다.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며 돌아누우신다. 한마디 더 하려다 문을 닫고 내 방으로 왔다. 어머니의 사랑은 한없이 깊다지만, 앞서는 걱정에 마음이 무겁다. 동생이 경제력이 생기면, 아니 우리 형제가 각기 가족을 이루면 어머니 자신을 돌보기 시작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가끔은 이런 어머니가 답답하다. 자식을 낳아야 부모 마음을 이해한다는데. 아직인 걸까.
스마트폰을 하다가 읽은 게시글이 생각났다. 제목이 아마 "인생의 꿀팁"이었던 것 같다. 내용은 이렇다. 인생의 꿀팁 하나 가르쳐 준다고. 지금 당장 집에 가서 스마트폰을 동영상 녹화 모드로 바꾸고 부모님을 찍으라고. 할 말 없어도 말을 걸고 괜히 장난도 쳐보라고. 그러면 언젠가 나한테 고마워할 날이 있을 거라고.
갑자기 왜 이게 떠오른 건지. 그래도 까먹지 말고 내일 아침 일어나 꿀팁을 실천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