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로 4,500만 원 대출은 어렵겠는데요."
다시 건네받은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서류엔 작년 한 해 동안 벌어들인 내 수입이 적혀있었다. 당연히 될 줄 알았던 대출은 내 생각과 달랐다. 주섬주섬 서류를 챙겨 일어섰다. 걸음 걸음이 씁쓸하다.
은행을 전전한 탓에 피로가 밀려온다. 급하게 돈이 필요한 일은 아니라 다행이긴 했지만, 기분이 울적하다. 은행에서 아무에게나 돈을 빌려줄 수 없으니 여러 조건을 따져보는게 당연하지만, 서류에 적힌 숫자들로만 내가 판단됐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 조건에 맞지 않았단 사실이 내 어깨를 무겁게 한다.
핸드폰이 울린다. 상사가 언제쯤 돌아올 거냐고 묻는다. 오늘 내 처리해야 할 일들이 떠오른다. 지금 가는 길이라고 대답하고 서둘러 회사로 향한다.
사무실은 평소와 같았다. 급한 일을 서둘러 처리하고 결론이 나지 않는 서류를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그러던 와중에도 새로운 일은 계속 생겼다. 야근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회식을 하자고 한다. 남은 일은 어떻게 하란 건지. 언제나 그렇듯 일은 줄지 않는다.
열 명 남짓한 상사에게 한 잔씩 술을 돌린다. 신입사원때 기겁했던 술잔 돌리기 문화는 어느새 익숙해졌다. 한 병, 두 병, 테이블엔 초록색 소주병이 쌓여가고 취기가 오른다. 그러자 '내가 니네들 나이땐 말이야'로 시작하는 인생의 조언이 쏟아진다. 죄인이 된 것마냥 한마디도 못 하고 듣고만 있다. 차라리 야근이 낫지 싶다.
스크린 골프를 좋아하는 부장님 덕에 다행히 회식은 1차로 끝났다. 젊은 직원들끼리 맥주 한 잔 하라는 말에 알겠다고 우렁차게 대답한 후 각자 집으로 향한다. 나는 차를 가져왔기에 대리기사님을 불렀다. 현금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신용카드도 된다니 세상 참 좋아졌다.
집에 도착해 차키를 건네받는데 저 멀리 복권판매점이 보인다. 술을 먹어서일까 아니면 오늘 대출을 거절당해서일까. 내 시선은 평소에 가지 않던 복권판매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학교 3학년 때였나, 돼지와 똥이 난무하는 꿈을 꿨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길몽 중에 길몽이라는 말에 복권을 사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그땐 복권을 사지 않았다. 자신감에 꽉 찬 나는 내가 성공할 사람이고 그런 성공은 요행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자신감은 해가 지날수록 옅어졌다. 차가운 현실에 꿈을 맞추자 이상은 점점 쪼그라들었다. 작은 꿈을 가진 나는 복권판매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왜 복권을 사는지 알 것 같았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판매점 안으로 들어섰다. 주인아저씨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티비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로또 만 원어치 주세요."라고 이야기하며 카드를 내밀었다. 주인아저씨가 무심히 돌아보고 피식 웃는다.
"로또는 현금밖에 안 돼요. 현금 없어요?"
"네? 카드가 안 된다고요?"
"전국 어디서나 똑같아요. 카드 안 돼요."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서둘러 문을 나섰다. 재빠르게 걸으며 판매점과 멀어지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요행을 바라지 말고 열심히 살라는 하늘의 뜻인 걸까. 덕분에 쪼그라든 꿈이 조금은 펴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