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대화를 하다 선물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선물이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이어도 시간이 지난 후 공간만 차지하고 사용할 수 없다면 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친구의 의견은 달랐다. 실용성이 좀 떨어지더라도 선물은 특별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달라고 했더니 친구는 "엄청나게 야한 속옷?"이라고 이야기하고 피식 웃는다. 말없이 따라 웃고 나서 화제를 돌렸다. 친구도 맞고 나도 맞다. 이건 가치관의 문제이기에 정답이 없었다. 굳이 꼽자면 선물은 마음이 중요하단 정도랄까.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선생님은 포도송이가 인쇄된 종이를 주시며 앞으로 칭찬받을 만한 일을 하면 포도알 스티커를 나눠줄 거라고 이야기하셨다. 무채색으로 인쇄된 포도송이에 색색의 포도알을 다 붙이면 선물을 준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친구를 도와주거나 발표를 잘하면 포도알 스티커를 주셨다. 선물은 큰 게 아니었지만, 열심히 포도알을 모았다. 스티커를 많이 받은 날은 가방에 잘 챙겨두었다가 어머니께 잔뜩 자랑했다.
그런 내가 인상 깊었던 걸까. 어느 날 어머니는 남는 색종이로 포도알을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하셨다.
"포도알 스티커엔 도장이 찍혀있는데? 그리고 색종이는 스티커가 아니잖아."
"도장이야 선생님이 찍어주시면 되지~ 스티커가 아니면 풀로 붙이면 되고~"
반신반의했지만, 선생님과 친구들이 좋아할 거라는 어머니의 말에 신이 나서 포도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남는 색종이를 모아서 스탬플러로 고정시키고 가장 위에 있는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색종이가 빼곡하도록 포도알을 그린 후 가위로 한꺼번에 잘라냈다. 한번 가위질을 할 때마다 색색의 포도알이 만들어졌다. 다 자른 후 모아보니 양이 꽤 되었다. 어머니는 색종이 포도알을 플라스틱 통에 담아주시며 선생님께 '선물이에요.'라고 하며 가져다 드리라고 하셨다.
다음 날 아침이 되길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선생님께 포도알을 가져다 드렸다. 선물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날따라 수업시간이 더 즐거웠다. 스티커를 다 쓰시면 선생님은 내가 만든 포도알을 친구들에게 나눠줄 테니까.
아쉽게도 그날 선생님은 색종이 포도알을 나눠주시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께서 스티커를 많이 가지고 계신가보다!'라고 생각하고 친구들과 집으로 향했다. 군것질을 하며 한참을 걸어가는데 실내화 가방을 두고 온 게 생각났다. 친구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아무도 없는 교실로 돌아왔다. 서둘러 실내화 가방을 챙기고 주머니에 있는 과자 껍질을 버리기 위해 쓰레기통을 열었다. 그리고 그 쓰레기 통엔 어머니와 내가 만든 색종이 포도알이 있었다. 하굣길, 반갑게 맞아주시는 어머니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평소처럼 수업하시는 선생님께도 마찬가지였다.
따뜻한 햇볕이 비치는 교실에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색종이 포도알을 바라보던 내 시선은 사진처럼 또렷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색종이가 아니라 실용적인 스티커를 가져다 드렸다면 달라졌을까. 그럴 것 같다. 선물을 주는 마음은 똑같은데 말이다.
선물 주고받을 일이 많은 요즘이다. 센스가 조금 아쉬운 선물일지라도 주는 사람의 마음을 먼저 생각한다면 연말이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물론 나부터 그래야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