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인생

6.25부터 시작된 트라우마

by 치의약사 PENBLADE


초딩시절 언젠가 친구들끼리 각자 아빠의 나이(?)를 놓고 다툰 적이 있었다. 우리 아빠가 더 젊어! 도 아닌 우리 아빠가 더 나이가 많아! 라고 자랑들 했던 황당한 상황이었다. 우리 아빤 몇 살이야! 우리 아빤 너네 아빠보다 나이 더 많아! 그 틈에서 난 할 말이 없이 풀죽어 있었으니 들어보면 아버지 나이가 가장 적었기 때문이었다...나중에 이 얘기를 어머니께 해드렸더니 어머니는 너가 다 이겼네, 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이가 많으면 그에 따른 지위가 더 높다고 여겼던 말기 공동체주의 사회의 에피소드였다고 할까..


나도 이제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이제는 아버지를 다 이해하게 되었지만, 나는 늘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말이 전혀 안통하는 분이셨고, 권위주의적인데다 가끔 두려울 정도로 고함을 치시던 분이셨다.


간암 말기로 아버지의 생명이 몇 개월 남지 않던 때, 어느날 집에 와보니 난생 처음 보는 할머니가 와 계셨다. 아버지의 친어머니라 하셨다. 친할머니와 아버지는 별 말 없이 묵묵히 식사를 하셨고, 나는 옆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 친할머니를 일부러 외면했다. 자식을 버린 최악의 어머니, 그 자식이 곧 생명이 다해가는데도 와서는 뻘쭘하게 앉아있던 그 분이 참 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살아오신 이야기를 나는 그 후로 십여년이 지난 후 어머니를 통해서 듣게 되었다.


1949년에 태어난 아버지가 돌이 지나 얼마 안됐을때 6.25 전쟁이 터졌다. 친할아버지는 어설픈 사회주의 운동가셨다. 전쟁 후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이혼하셨고, 친할머니는 자식들을 두고 어디론가 떠나셨다. 친할아버지 역시 무슨 활동을 하셨는지 집을 떠났고,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은 큰할아버지(아버지에겐 큰아버지) 댁에 맡겨졌다.


아버지께서는 큰할아버지 내외가 아버지 형제를 친자식처럼 보살펴주셨다고 했지만, 태어나고 얼마 안돼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가 친척집에서 내 집처럼 마음 편하게 지냈을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큰아버지댁 자식들도 많았는데 그 속에 얹혀 살게 된 아이는 당연히 눈치를 봤을거고..큰댁 자식들이 형제자매처럼 대했다고는 하지만 별 생각 없이 투정부리던 어린 아이들이라 별 생각 없이 상처주는 말도 자주 했을거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시절 큰 댁에 내려갈 때마다 나는 기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곤 했다. 아버지 혼자 큰할아버지와 삼촌 고모들에게 엄청 친근하게 굴었고, 삼촌 고모들은 그런 아버지를 대화의 중심축으로 삼는 느낌이었다. 삼촌 고모들 사이가 썩 좋아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가장 나이 많은 큰아버지가 동생들의 돈을 받아다 투자했다 엄청난 실패를 해서 모두가 빚을 졌다는 이야기. 더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큰 댁 삼촌 고모들은 그 일로 한바탕 싸우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큰댁에서 눈치밥을 먹으며 삼촌 고모들에게 늘 웃고 친근하게 대하려 노력했을 것이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 사건이 터진 후엔 결국 아버지가 삼촌 고모들에게 제일 편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내 추측이다.


아버지는 공부를 잘했지만 그 시절 큰댁은 아버지를 대학에 보낼 정도로 여유 있지 않았다. 가족을 잃은 결핍 때문이었을까, 아버지는 천주교 성당에 열심히 다녔고 고등학교도 광주의 사레지오 고등학교라는 천주교 재단 학교를 나오셨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1년간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교사를 하셨다. 아버지가 워낙 정이 많으셨던 분이셔서 그랬는지 그 시절 아버지의 제자였던 분들은 아버지가 마지막에 병상에 누워 계셨을때 병원까지 찾아와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그 분들이 오셔서 한참을 울고 가셨다.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와 이런 저런 일로 돈을 벌다 대학을 늦게 가셨다. 한양대 경영학과에 4년 내내 전액 장학이 입학 조건이었다고 한다. 등록금을 내야 하는 대학은 애초에 가실 수가 없었다. 그 당시 경영학과라는 건 있는 집 자제들이 와서 경영 수업 쌓고 물려받을 사업체를 위한 기반을 다지는 곳으로서나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 친구분들 중에 기업체 사장님들이 많았다) 내 생각에 당시 가난했던 아버지는 자신에게 어떤 전공이 맞을지 파악할 여유도 없지 않았을까 싶다. 한마디로 '안맞는' 곳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졸업 후 아버지는 한양 건설이라는 곳에 취업하셨고.. 어머니와 결혼 후 중동 건설 현장에 돈 벌러 가셨다. 그 때 번 돈 중 일부는 집을 사는데 사용됐고 일부는 투자 사기로 사라졌다. 어머니는 중학교 교사로 일하셨는데 일을 무척 힘들어하셔서 우리집엔 할머니가 오셨다. 어머니가 가장 힘들때 내가 태어나 나는 어려서 엄마고파병에 힘들어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케어해주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는 그 후로 계속 일이 잘 안풀리셨다. 회사가 부도나고...광림이었나? 하는 중소기업에 가셨다 이런저런 회사를 다니셨지만 늘 힘든 일만 하셨고 회사들이 하나같이 잘 안됐다. 아버지가 전공을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버지가 회사 생활에 요령이 없는 분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어서다. 정이 많고 감성적인 성향의 아버지에게 당시 아버지가 다니셨던 회사들은 아버지와 맞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시골 사람이었던 아버지와 도시 생활은 어울리지도 않았다. 직장에서 주로 영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늘 일을 힘들어하셨고,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은 트라우마와 상처, 결핍된 마음 등등 때문에 항상 술을 입에 달고 사셨다. 우리들과 대화도 잘 안통했다. 아버지와 말을 나누다보면 어느새 아버지는 자기 말만 길게 늘어놓으시곤 했는데, 그 땐 그런 아버지가 너무 답답하고 짜증났다. 인간 심리에 대해 많은 것이 연구된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평생 어디서도 자기 말에 공감을 못받고 사셨던 것 같다. 가부장적인 시골 전통 사회에서 살았기에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도 못배우셨을 거고, 무엇보다 어려서부터 눈치보며 살던 아이가 속내를 쉽게 드러내는데엔 두려움도 크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와 대화를 시작하면 늘 아버지가 길게 자기 얘기만 했던 것은, 어디서도 들어주지 않는 자기 말을 가족들에게 공감받고 싶어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가족들은 그런 아버지가 싫었다. 트라우마와 상처는 대를 이어 내려온다고, 우리 가족들 모두 비슷한 결핍이 있어서였을까. 서로가 서로의 말에 공감해주는 여유들이 없었다. 그 속에서 아버지는 점점 고립되었다.


아버지는 평생 자기만의 공동체를 찾아 헤매셨던 것 같다. 그래서 성당 모임에도 자주 나가고, 가족들 모두 성당 미사에 참여하기를 원하셨다. 나는 일요일 아침마다 성당에 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재미도 없고 엄숙한 그런 분위기 속에 들어가기 위해 일주일 중 유일하게 늦잠잘 수 있는 일요일 아침을 낭비(?)하는게 너무 괴로웠다.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들 모두 한마음이었다.


아버지는 회사나 사회 생활도 열심이셨다. 그 때만 해도 시골에서 상경해 직장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많던 시기이자 여전히 한국식 공동체주의가 사회 곳곳에 남아있던 후기 산업화시대여서 그랬을까, 아버지 말고도 그런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꼰대'라 부르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셨다. 직장을 집처럼, 직장 동료들을 가족처럼 여겼던 분들. 직장이나 사회 공동체와 어울리며 늘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와서는 가족들과 어울리지도 못하고 밤늦게 혼자 티비보다 주무시던 아버지. 아버지는 점점 더 외로워지셨다.


아버지는 간암 진단을 받고도 2년 동안 나와 누나에게 말씀을 안하셨다. 어머니도 말씀 안하셨다. 간암 중에서도 특이하게 손 쓸 수 없는 케이스였다고 했다. 지금은 그 때보다 의술이 더 발전했을텐데 지금이었으면 치유가 가능했을까. 이식을 해야 하는데 우리들에게 간이식을 부탁하기 미안하셨을까. 2년이 지난 후 완전히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전신에 암이 퍼졌을때서야 우리는 아버지의 상태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 매일 갈 때마다 아버지는 여기 오지 말고 각자 할 일과 공부 계속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때서야 아버지께 미안한 마음과 측은한 마음 등등 여러가지 감정이 폭풍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더이상 손쓸 수 없을 지경이 되고 아버지가 자꾸만 피곤해 하시며 잠에 들 때마다 나는 참 세상이 야속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저렇게 일평생 고생만 하셨는데 말년까지 병원에서 저렇게 힘드셔야 하나. 나보다 먼저 자기 아버지를 간암으로 보내드린 친구가 몇 달 전 내게 가족들과 상의해서 어디 길게 여행이라도 갔다 오라고 조언해주었었다. 하지만 이미 그런 시기도 다 지나버렸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분이 갑자기 이렇게 빨리 무너지다니. 말기암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 때 처음 알았다. 아버지를 찾아오신 분들이 아버지께 "곧 나을거니 걱정 마! 꼭 일어날거라고!" 라고 말씀들을 하셨지만 나는 그런 그 분들의 말들이 참으로 어이없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뭐하러 왔나 싶은 생각만 들었다.


아버지 병간호를 하고 집에 돌아온 어느날 밤. 나는 갑작스레 떠오른 여러가지 생각으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가 안타깝기도 했지만, 참으로 야속하기도 했고, 속상한 마음도 들었다. 왜 그렇게 허구헌날 밖으로만 나돌고 술이나 쳐마시곤 하셨나. 그러게 자기에게 맞는 일 하고 조용히 사시지 뭘 그렇게 헤매고 사셨나. 그 때 나는 어렴풋이 '결핍과 트라우마'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깊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느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던 것은 어쩌면 내 몸의 감각 세포들이 곧 일어날 일을 미묘하게 감지하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날 새벽에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셨던 큰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밤중에 교대로 아버지 옆에서 병간호를 하고 계셨던 분이셨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다. 빨리 와라."

나는 엄마와 누나를 깨우며 큰아버지께 물었다.

"뭐 준비해 가야 할까요?"

"그건 모르겠고 빨리 와라."


나는 그 때 왜 뭔가를 준비해 가야 한다고 여쭤봤을까.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이었지만 그 때도 지금도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 가족은 급히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소리를 죽이며 우셨고, 누나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담당의는 오전 중으로 사망하실 거라고 말했다. 연명치료를 해봐야 몸만 힘들고 어차피 오후에 돌아가실텐데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괜찮다고 대답하셨다. 가족들은 차례차례 울면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때 나를 보던 아버지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아버지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도 아무런 말씀도 하지 못했다. 큰아버지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아버지의 손을 꼭 그러안고 아버지의 이름을 반복해서 외쳐 부르셨다. "현수야..현수야..현수야..!"


장례식이 끝나고 몇 일동안 집에서 멍하니 앉아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얼마 전까지 집에 계셨던 아버지는 이제 더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화장터에서 아버지 몸이 다 타고 얼마 남지 않은 뼈와 같은 잔해물이 놓여 있던 받침대가 생각 났다. 그러다 갑자기 엉뚱하게도 아버지는 어떻게 사셨어야 했을까, 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 시절 시골에 살던 큰아버지네 가족들이 모두 올라온 것으로 보아, 그 시절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와야 했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치고. 대학을 가야 했다면 교사가 되기 위한 교대나 사대가 적절했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예뻐해주며 보람을 느끼셨을 분이다. 일 년에 두 달 가량 방학때 쉬는 것도 아버지 건강에 좋았을거고, 5시면 집에 오셨던 어머니처럼 늦게까지 일 안한다는 점도 아버지가 술을 덜 마시는데 도움이 됐을테고. 무엇보다 회사 생활을 하며 거친 생활을 하기 보다 온순한 아이들과 교사들 속에 있는게 정신 건강에도 도움 됐을테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천주교 성당 생활이나 열심히 하셨다면..


아버지는 내가 어떻게 살길 바라셨을까. 나는 아버지가 내가 살길 바랬던 그런 삶을 살고 있을까. 아버지는 평소에도 나보고 회사 가지 말고 공부나 하고.. 자격증 있는 일을 하라 하셨다. 아버지의 그런 말씀이 귀에 박혔는지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아버지도 품었던 마음 속 트라우마와 결핍은 나에게도 있고, 여전히 극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따금씩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아버지도 비슷한 괴로움에 허전하고 외로우셨을 거란 생각이 들곤 한다.


나는 아직 초등학생인 내 아이에게 언젠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게 중요하다고 자주 말하곤 한다. 싫은 일, 힘든 일은 할 필요 없고, 싫은 사람도 만나지 말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서 놀기에도 인생은 짧다고. 아이는 어린시절의 나보다 훨씬 더 심적으로 건강한 것 같아 다행이다. 아버지는 나의 아이를 보지 못하고 가셨지만, 천국이 있어 거기 계시다면 당신의 손자가 건강하게 잘 자라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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