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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기분

논리는 그냥 감정을 합리화시키는 도구일 뿐

by rextoys

언젠가 중국 상하이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 환승을 위해 대기한 적이 있다. 환승줄에 서 있는데 어떤 중국인 가족이 슬쩍 새치기를 했다. 주변 사람들 모두 어이 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다들 앞의 긴 비행 여정에 지쳐서였을까. 나 역시 피곤하기도 했지만 곧 귀국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한 상태여선지 그냥 '마음이 오죽 급했으면 저랬을까. 계속 서 있는 자기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랬나 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번은 버스를 기다리는데 날도 덥고 짜증이 있는대로 난 상황인데 버스줄은 한없이 길었다. 드디어 버스가 도착해서 차례차례 사람들이 탑승을 했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가 새치기를 해서 그대로 올라 탔다. 주위 사람들이 불만스런 목소리로 수근댔다. 나도 갑자기 화가 났다. '다른 사람들은 이 땡볕에 괜히 줄섰나? 저런 식으로 남의 귀한 시간을 훔치는 게 나이 든 사람이 할 짓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법과 규칙, 윤리의식과 논리 등등을 들먹이며 상황을 판단하려 하지만, 실은 그보다 더 앞서는 게 나의 감정과 기분이다. 이제 막 사귄지 얼마 안 돼 행복한 감정이 넘치는 두 연인들은 눈 앞에 벌어지는 모든 것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같이 여행 가서 소매치기를 당해도 '여행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저 소매치기도 얼마나 삶이 궁했으면' 하고 이해해주고, 불친절한 식당 종업원에게 '그래, 이 휴일에 일하러 나와서 얼마나 기분 찝찝할까' 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직장에서 심한 스트레스와 좌절을 겪은 사람은 소매치기를 보면 법을 어긴 죄는 마땅히 처벌 받아야 한다고, 저런 범죄자는 감빵에 쳐넣어 사회 질서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불친절한 식당 종업원에겐 감히 돈주는 고객을 무시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책임을 망각한 뺀질이라고 욕할지도 모른다.


법과 규칙, 윤리와 논리, 합리적 원칙 등등을 들먹이며 상대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볼 땐 또 다른 싸움을 예고하는 것일 수 있다. 반박당한 상대는 기분이 상해 어떤 식으로든 다시 트집을 잡고 싸움을 걸어올 것이고, 여의치 않으면 그 외의 온갖 방법으로 괴롭히려 들지 모른다.


그래서 법원에서 판단 받을게 아니라면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토론이나 논쟁은 그닥 환영받기 힘들다.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 더 좋은 방안을 강구할 때는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의 논쟁은 누가 이겨도 관계에 상처만 남길 뿐이다.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 간에는 어떤 논쟁과 토론도 결국은 그냥 재미있는 놀이로 남는다. 하지만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 사이의 논쟁과 토론은 결국 싸움과 적대감으로 이어진다. 같은 주제로, 같은 방식으로 토론해도 마찬가지다. 핵심은 토론 주제가 아니라 서로가 갖고 있는 감정과, 대화를 나눌 때의 기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내 감정과 기분에 따라 옳고 그름이 바뀌고, 도덕적 원칙과 논리적 사고 흐름도 바뀐다. 그래서 세상에 그 누구도 객관적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옳고 그름을 놓고 싸우는 모든 논쟁이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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