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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을 맞으며

드디어 만 40이 되었다

by rextoys

얼마 전, 만 40세 생일을 맞았다. 올해 초부터 한국 나이를 없애고 만 나이를 도입하자는 법안이 도입되기를 간절히 바랬었다. 생일이 지나기 전까지는 여전히 만 39세였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 없게 되었다. 어떻게 나이를 세도 이미 내 나이 앞 숫자에 3을 붙이는 것은 불가능해졌으니까.


요즘 불혹에 대해 실감한다. 단순히 유혹이 사라졌다는 느낌 이외에, 세상 그 어떤 것도 무조건 옳거나 그른 것이 없고, 마냥 좋거나 나쁜 것이 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지금보다 젊을 때는 간절히 바라는 것도,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꽤 많았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강렬히 원하는 게 없어졌다. 그저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 모두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기를 바랄 뿐.


유유상종이라고 나와 친한 또래들 모두 비슷한 상태에 도달한 것 같다. 대화를 나누다보면 다들 뭐 그렇게 강하게 원하는 게 없다고, 열정과 의욕이 사라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다보니 열심히 살거나 뭔가를 강렬히 추구하는 에너지도 부족해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어느 순간 뒤쳐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도 같이 찾아온 것에 다들 공감한다.


하지만 동년배 지인들이 모두 그런건 아니다. 오히려 인생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마인드로 더더욱 열심히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친구들도 많다. 끼리끼리 만난다고, 그런 지인들과는 어느새 거리가 꽤 멀어진 듯한 느낌이 있다. 비슷한 열정과 에너지를 가진 지인들은 또 그네들끼리 자주 어울리는 것 같다.


한편으로 편안해진 부분도 있다. 솔직히 지금보다 젊은 시절, 나 역시 꽤 욕심이 많았다. 잘 풀리는 친구들을 보며 부러움과 시샘의 감정을 가지기도 했고,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싶어 이것저것 시도해보기도 했다. 내가 가진 것은 늘 부족해 보였고, 남들은 늘 나보다 몇 발자욱은 훨씬 앞서있다는 생각에 초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나이가 들고보니 어떤 인생을 살아도 결국은 자기 만족이 최고고, 우리 모두는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의 점에 불과할 뿐이었다는 깨달음이 찾아오더라. 화려해보이는 인생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그저 일상의 하루 한시간 일 분을 어떻게 마음 편히 즐겁게 보내는가가 삶의 거의 전부라는 사실도 통렬히 깨닫게 되었다.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그다지 필요한 게 없다보니 인플레 시대에 오히려 나를 위한 씀씀이는 줄었고, 반드시 얻거나 성취해야 한다는 강박도 모두 사라졌다. 이제는 몇 년 후를 내다보고 지금부터 뭘 해야겠다는 생각도 안하고, 그저 아침에 일어나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해야 잘 보낼까 하는 생각만 남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지금을 인생 제 2막의 시작으로 보고 뭔가 또다시 열정을 불태울만한 것을 찾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20대, 30대에 가졌던 욕심과는 좀 다르다. 그 때는 솔직히 남의 눈을 신경 많이 썼고,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한 것들을 불안한 감정 속에 추구하는 경향이 컸다면, 이제는 그저 나를 위한 무엇인가를 찾고 싶어졌다. 사회적 성취 보다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꿈에 불을 지피고 싶다는 느낌이려나.


이것도 꽤 시간이 걸리는 듯 하다. 약간의 힌트를 찾았다면, 이제는 가족들도 잘 챙기고, 좋은 사람들과 더 자주 만나고, 흥미 있는 취미를 가지고 싶다는 바램이 커졌다. 요즘 화실을 나가며 유화를 조금씩 그리고 있는데, 의외의 재미가 있다. 비록 지금은 남의 작품을 따라 그리는 연습 단계이지만,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그림을 물감으로 쌓고 만들어낸다는 느낌이 참 뿌듯하다. 오랫동안 연락을 안했던 지인들 중 문득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전화하고 싶다는 생각도 부쩍 커졌는데, 아직은 좀 망설여지게 된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걸까.


한국 사회는 수십년간 지속된 성장 중심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런지,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담론과 계획, 시스템은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지만, 마흔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느낌이 든다. 결혼하고 아이를 양육하고 돈버는 것만으로도 바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일까. 마흔이 되고 보니 이 나이 이후의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사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어릴때는 마흔 이후의 삶을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많은 나이라고만 생각했고, 그 나이가 되면 거의 모든 것이 결정되어버려 더이상 인생의 방향을 놓고 고민하는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흐름에 떠밀리듯 살다가 중년, 노년이 되고 자식의 인생을 응원하며 말년을 보내는 것이 전부일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동안 세상은 참 많이 변했고, 각자 자기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그저 '뭐 별로 바뀔 일은 없지만 응원은 합니다' 수준의 위로와 같은 말이었는데, 지금 시대엔 이 말을 문자 그 자체의 의미로 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어찌보면 그만큼 사회가 성숙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이에 집착하지 않고 자기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문화가 자리잡히고 있다는 뜻이다.


40대가 되고 보니, 건강을 위해 식습관에 신경쓰고 술담배를 끊고 운동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옵션이 붙었을 뿐, 여전히 뭔가를 시작할 시간은 충분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20대에 생각했던 것만큼 40대의 일상은 그렇게 빡빡하지도 않고, 의욕과 에너지의 문제는 있어도 적어도 인생의 선택지와 기회는 그다지 줄어들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사회 시스템이 따라잡지를 못하고 있지만, 앞으로 10년, 20년이 흐르면 늦은 나이에 뭘 시작해도 전혀 문제가 안생길만큼 중년 이후의 사람들에게도 많은 기회가 주어지도록 사회도 바뀔거라고 본다. 요즘 출산율이 최저다, 인구가 줄고 있으니 위기다 말하지만, 이 부분은 바꿔 말하면 중년 이후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도록 사회 시스템 자체가 바뀌게 될거란 기대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미 태어난 사람들이 나이 먹으면서 변화하듯, 세상도 같이 나이를 먹고 변화한다. 다만 몇 년 후 혹은 십 년 이상 후 변화된 세상이 제공할 좋은 기회와 혜택들을 잡으려면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다만 20대처럼 불안 속에서 쫓기듯 달려가는 것보다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사회적 성취에 자신을 끼워맞추기 보다 자기 스스로를 만족스럽게 빛내는 방식으로.


대학 시절, 어느 40대 선배가 그랬다. 나이 40이 넘으면 어차피 다들 비슷비슷하게 사니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며 살라고. 자기도 그럴걸 좀 후회된다고. 그 분의 말씀을 사람들 모두 별 생각없이 흘려들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 말이 진심이었음을 알겠더라. 그 분도 그 시절 후회만 하지 않고 새로 뭔가를 시작해서 지금은 자신의 꿈에 더 가깝게 왔기를 바란다. 그 선배도 그 시절, 전혀 늦지 않았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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